나야, 고릴라 아이세움 지식그림책 13
조은수 글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나야 고릴라’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하마는 엉뚱해’와 같은 밝고 유쾌한 그림책인 줄 알았다. 고릴라는 우리집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고, 신기하게 여기는 동물이라 몰랐던 사실도 새로 알게 되면서 즐겁고 가볍게 읽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펼쳐 들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기분이 즐거울 수가 없다. 이런 내 마음과 달리 일곱 살인 큰 아이와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세살 둘째 아이는 고릴라가 노래를 부르고 나뭇잎으로 침대를 만들고 그걸 또 아침밥으로 먹는 다는 게 신기한가 보다. “우당탕탕 우당탕탕” 하면서 고릴라가 노래 부르는 걸 흉내내며 방안을 돌아다닌다.

물론 큰 아이는 고릴라가 엄마, 아빠와 헤어져 밀렵꾼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보고 왜 그런지 묻기도 하고, 배안이나 동물원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이야기에서는 나처럼 표정이 굳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그래 아직은 그럴 때이구나.


‘아이세움 지식 그림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나야 고릴라’는 사람의 눈으로 동물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고릴라의 처지가 되어 고릴라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옆 쪽에는 아기 고릴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덧붙여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서 고릴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런데 고릴라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 평화로울까 싶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배위에 엎드려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하루종일 누워서 뒹굴며 엉겨 붙어 놀거나 풀과 과일을 우적우적 먹는 모습은 고릴라의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누굴 잡아 먹지도 않고, 괴롭히는 일도 없이, 햇살이 따스한 날,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행복을 느끼는 날은 노래를 부르며 서로 껴안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고릴라야말로 천상 낙원에서 사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든다.

더구나 고릴라 부부의 새끼 사랑방식은 너무나 부드럽고 자상하다. 은빛등을 지닌 아빠 고릴라는 힘이 세서 가족을 지켜주지만, 이동할 때는 무리 가운데서 가장 느리고 허약한 가족의 발걸음에 맞춰 주고, 어린것들의 장난도 참을 성 있게 받아준다니 부모로서 우리 사람들은 어떠한가 반성이 된다.


고릴라는 좀처럼 화를 내지도 않지만, 화가 나면 쿵쾅쿵쾅 가슴을 치고, 누가 귀찮게 굴면 싸우는 대신, 벌떡 일어서서 가슴을 치거나 풀을 잡아 뽑거나 ,나뭇잎들을 휙휙 내뿌린다니 이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성가시게 굴지만 않으면 절대로 먼저 남을 공격하지는 않는다는데 이런 고릴라를 가장 속상하고 화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끄럽게도 그건 사람들이었다.

고릴라는 신경이 예민해지면 묽은 똥을 싼다고 하는데 밀렵꾼에게 쫓기거나 가족이 살해당하면 이런 똥을 싼다. 고릴라는 한 가족이 위협을 받으면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두들 목숨을 내놓고 싸우기 때문에 밀렵꾼이 동물원에 보낼 새끼 고릴라 한 마리를 얻으려면 고릴라 가족 모두를 몰살해야만 한다고 하니 이보다 끔찍한 비극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고아가 된 아기 고릴라는 미국이나 유럽의 동물원에 팔려가기까지 긴 여행을 하는 도중, 배안에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잡힐 때 겪었던 충격과 한꺼번에 가족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먹지도 않고 시름시름 앓기 때문이다. 동물원에 도착한 고릴라라 할지라도 그 사정은 다를 바 없다 하니 고릴라의 가족사랑은 너무나 끈끈하고 애틋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책 한권을 통해 고릴라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생김새는 우스꽝스럽고, 덩치는 커서 둔하고 과격할 거라고 생각해온 고릴라가 연한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여린 감정을 지닌 동물이라니…….놀라웠다.

동물원에서 본 고릴라는 멍해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먹는 거 던져 주면 그거 받아먹는 거나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동물원에 있는 고릴라가 사람들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다. 고릴라한테 먹을 거라도 던져 줄 요량으로 우리 가까이에 붙어 있다가는 언제 침 세례를 받을지 몰랐다. 고릴라가 있는 우리를 지날 때는 그래서 조심해야 했고, 가까이 가서 볼 때도 고릴라의 기분을 살펴야 한다고 말들 했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침을 더 많이 뱉는다고…….

이 책을 읽고 나니 고릴라의 그런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고릴라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으면서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나 보다. 사람과 너무나 닮은 점이 많은 동물이라서 가족간의 접촉을 통해, 장난과 놀이를 통해서만 자기가 할 일을 배운다는데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릴라가 사람들에게 그렇게라도 저항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의 마지막장에는 아프리카 산속의 오두막에서 19년 동안 혼자 살면서 고릴라를 연구한 다이안 포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려서 부모가 이혼해 외롭고 쓸쓸하게 어린시절을 보낸 그이는 열아홉살 때 고릴라 연구를 위해 르완다에 들어가 고릴라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고릴라의 두터운 가족사랑을 보면서 고릴라에 빠져들었다는 그는 밀렵꾼에게 죽어간 고릴라를 가족처럼 생각하며 고릴라 무덤을 만들었고, 밀렵꾼들부터 고릴라를 지키다가 두개골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죽임을 당해 그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다이안 포시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어쩌면 인간이 동물에게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럽지만, 한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봄이 되어 다시 아이들과 함께 동물원을 찾게 되면 이 책 ‘나야 고릴라’를 다시 한 번 읽어 봐야 겠다. 큰 아이는 고릴라가 엄마, 아빠를 모두 잃고 동물원으로 오게 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차마 거기에 덧붙여 뭐라고 말을 해주지는 못했다. 고릴라뿐만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처지가 다 비슷비슷할 텐데 그 모든 걸 아이한테 말해주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봄이 되어 동물원을 찾게 되면 가족을 모두 잃고 동물원으로 내몰리게 된 고릴라이든, 아님 억지스러운 짝짓기를 통해 동물원 인큐베이터에서 주사와 약으로 길러진 고릴라이든 다시 만나게 되면 마음으로나마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야 고릴라' 이 책은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가슴에 새길 책이 될 것 같다.
평소 동물을 좋아하는 남편한테 이 책을 보여주니 '이걸 모르고 있었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고릴라가 원래 부드럽고 착한 동물이라는 것, 동물원의 비극 이 모든 걸 모르고 있었나?

그래 모르고 있었지. 나는 몰랐다.
고릴라가 그렇게 부드럽고 여린 동물이라는 걸, 엄청난 비극을 안고 동물원에까지 잡혀 온다는 걸 생각 못했다. 그리고 가족과 헤어진 슬픔을 못이겨 시름시름 앓는다는 걸 생각지도 못했다.
조은수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다이안 포시라는 여성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본다.
부모의 이혼으로 외롭고 쓸쓸한 유년시절을 보낸 다이안 포시는 고릴라들의 두터운 가족애를 보면서 인간보다 오히려 낫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작가 조은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고릴라 이야기를 몇년동안 마음에 품고, 또 이 책을 쓰고 난 뒤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걸 출판사 소개글에서 봤다.
책 한권으로 얻은 느낌만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길 것 같은데 이 책을 쓰는 동안 작가는 어땠을까?

그러나 무거운 주제와 달리 이 책의 그림은 아주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난다.
글은 하나도 어렵지 않고 너무나 쉽게 읽힌다.
마음이 무거워 지는 책 한권을 만나, 고릴라에 대한 내 생각이 바꼈다.
자연이라는 큰 질서 안에서 같이 살아가는 동물과 사람.
그안에서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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