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살아있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남기 완벽 공략
맥스 브룩스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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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브룩스가 정색을 하고 쓴 (것처럼 연기를 하는) 이 책은, 하나의 치밀하고 거대한 농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관련 서적들은, 보이스카우트 야영 지침서나 군대에서의 작전 교범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늘 지니고는 있지만 실제로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 기나긴 농담에는 뭔가 진실을 환기하는 구석이 있다. 특히, 좀비라는 존재들의 특성이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과 날카로운 이항대립을 이룬다는 점은 충분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좀비의 기본적인 특징은, 그들이 바이러스로 인해 치명적인 뇌 손상을 입었으며 곤충과 비슷한 수준의 지능을 가진,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점을 거듭해서 강조하는데, 특히 나름의 감정, 생각, 통증을 느끼는 부두교의 좀비들은 자신이 설명하는 ‘진성 좀비’들과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가 강조하는 ‘진성 좀비’들은 질병의 프레임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며 그들은 절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며 기억도 없고 감정도 없이, 오로지 놀라운 지구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그들의 욕망이란 살아있는 생명체의 인육으로 한정되는데, 그들이 즐기는 것은 특히 인간의 육체,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로 설정이 되어있다.

 

좀비의 이미지는 이미 여러 대중문화의 영역이나 매체를 통해서 왕성하게 소화되고 있는 아이콘 중 하나인데, ‘좀비 PC'라는 용어가 사회면을 아무런 주석 없이 장식하기도 하고 별 다른 의욕이나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청춘들이 자기를 비하하는 방식으로 유쾌하게 소비되기도 한다. 올 한 해 쉬지 않고 지속되었던 중동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담아내는 뉴스 화면에서 시위대들이 전시되는 프레임의 이미지는 묘하게도 스크린에 등장하는 좀비들의 서성거림이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좀비들은 또한 자신의 생존권에 발목이 잡혀 노동의 현장을 떠나지 못 하는, '혼이 사라진 노동자'들의 웅성거림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백화점을 배회하며 반값세일에 탐닉하는 맹목적인 소비자들의 이미지를 소환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환상’이 결국 ‘실재’를 침범하고 재구축하는 일이 잦다는 측면에서 볼 때 좀비에 대한 환상과 상상들은, 이 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미 우리의 현실을 침범하여 일정 수준의 지분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서바이벌 가이드’는 오히려 실제적인 좀비의 출현과 철저한 대비를 뻔뻔스럽게 강요하는 인상이다.

 

개인적으로 좀비의 특징 중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상징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그들이 ‘죽음’을 거부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죽음’의 거부와 관련되어서는 여러 가지 인류학적, 문학적 측면이 참조들이 존재하겠지만, 이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치료적으로 승화시킨 글은 아마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일 것이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타자의 죽음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이를 내면화한다면 정상적인 애도 경험이 진행되겠지만 이를 거부할 경우, 이는 우울증, 멜랑콜리아로 이어진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요약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좀비들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 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들의 생명, 살아있는 육체를 요구하는데 이들의 이러한 ‘강박적인’ 행동에는 강렬한 현실 부정의 기운이 역력하다. 내가 죽지 않았으며 살아있다는,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타인의 생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행위에는 일정 수준의 절박함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이들의 등장에 뱀파이어나 늑대인간과 같은 몬스터들이 가지는 탄생 설화나 사연이 없다는 점이나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우발적인 사고를 통해서 등장하게 된다는 점, 쉽게 훼손되는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는 데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는 점 등 이들의 존재에 ‘하찮음’이라는 단어를 조합하기 위한 모든 전제 조건은 그들의 탄생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갖춰져 있다. 이 책이 좀비의 특징을 소개하는데 50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할애한 뒤 나머지 분량을 각종 무기와 생존 기술에 대한 상세한 소개로 채우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미친 듯이 ‘배척’을 휘두르고 근접전의 기술을 연마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너의 머리는 쓰고 좀비의 머리는 잘라버리라는 것이다. 즉,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

 

좀비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좀비(의 머리)를 파괴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가 나중에는 일종의 ‘장인’처럼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상황 설정이 많다. 주인공들이 좀비들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순간, 이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저건 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지나간다. 하지만 곧 '그들은 좀비라는 설정'을 다잡은 다음 이미 ‘죽어있다고 설정되어있는 신체’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해체되어가는 과정에 다시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좀비들이 자신들의 신체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이러한 움직임이나 생명의 이미지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전시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애초에 좀비들의 ‘육체적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전제, 그들은 이미 죽어있다는 전제 자체에 그들에 대한 적절한 ‘애도 반응의 실패’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아닐까.

 

좀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선언된 죽음'을 거부한 존재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죽음 자체가 적절하게 애도 되어지지 못한, 버림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의 존재의 목적이 우리들의 생명, 살아있는 신체의 획득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들을 애도할 여유 따위는 없게 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그들이 일어나기 전에 뭉치고 두려움을 떨쳐버린 뒤 아마도 그들의 목을 따야 될 것 같다. 쉬지 말고 움직이며 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자신의 좀비 제거 기술을 펼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 한 채로 그들의 육체를 해체해야 할 것이다.

 

맥스 브룩스라는 '코미디 작가'가 ‘911 이후의 미국’에서 쓴 이 survival guide의 부제는 'complete protection from the living dead'이다. 전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그의 섬뜩한 농담은 우리가 좀비, 혹은 ‘Living Dead'라는 존재에서 그의 Living보다는 Dead라는 부분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난처하게도 우리가 좀비, 혹은 living dead라는 creature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사실 하나 밖에 없는 듯하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애도하는 것, 혹은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삶에 죽음을 기록하고 새겨넣어 잃어버린 숭고함을 회복하게 하는 일 말이다.

 

그래서 좀비를 확인하고 식별해내는 간단한 tip이 존재하게 된다.

어떤 시위대가 좀비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도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그 시위대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등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목표가 누군가의 죽음을 은폐하려는 것이라면 이 두 세력 중 어느 쪽이 솔라눔 바이러스의 세례를 받았는지는 명확해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맥스 브룩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이러한 좀비 색출법의 세세한 목록을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해 그 거대한 농담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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