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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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로봇의 완벽한 사랑을 선택했소. 뒤에 남은 나는 조지에게 버려진 불완전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지."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여자들도 몇 가지는 누릴 자격이 있지." 어머니가 말했다.

"투표권도 있고 술집도 마음대로 드나들잖아요." 얼이 말했다. "이젠 또 뭘 원하나요, 남자 투포환 대회 참가 자격?"

"당연히 지켜야 할 예의."

긴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조지는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가 선한지 악한지에 관심을 가질 만큼 그녀를 사랑한 사람이 이제껏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겼다.

벌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일에 자신이 화를 내지 않는다면, 자신은 무가치한 목사가 될 거라는 것 또한 조지는 이해했다. 원만함, 수줍음, 용서는 소용이 없다.

"지켜보시려면 분명 가슴 아프시겠죠, 마에스트로?"

"꼭 그래야 하나? 왜?"

"니키처럼 전도유망한 예술가가 사업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노래에서 점점 멀어지는 걸 보시려면요."

"아…… 그거 말인가. 자기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니키는 행복하다네. 그게 중요한 거지."

"그래, 정말 밥을 굶는 건 아니지." 그가 배를 두드리며 인정했다. "하지만 내 영혼은 안정, 약간의 여윳돈, 어느 정도의 자존심에 굶주려 있어."

내 생각에 니키의 남은 인생은 전부, 그의 어머니가 약속했던 미래와 그가 그 모든 걸 이루는 순간 사이의 막간이 되는 게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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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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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이 이제 우리의 시각을 대신할 거다. 세월호 참사는 상像으로 맺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콘택트렌즈마냥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시각, 눈目 자체로 변할 것이다.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다 속에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에 담긴 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그 누구도 요약할 수 없는 개별적인 세계가 팽목항 어둠 속에서 밤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낮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울렸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길을 가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아랫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였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상복을 입은 내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삶의 생생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슬픔 속에 숨기려 해도,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傾斜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그러자 곧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게 바로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이다. 우리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으로 선출한 권력은 자신을 개조할 권한 자체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 나아져야만 하며,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한다.

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말했다시피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며,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우리가 착각하는 한, 점점 나빠지는 이 세계를 만든 범인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은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한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자신의 실수만을 선별적으로 잊어버리는 망각,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나만은 나아진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해도 보수는 부패로 망하지 않는다. 분열엔 의리가 없지만 부패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량하게만 살다 떠나지 말고,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라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der Edle가 갖는 감정이다. 고결한 자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며, 그 역량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 세계에서 내 처지는 어떤가.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신의 노여움을 잠재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사람 자리로 슬쩍 바꿔 앉는 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 상투적인 위령慰靈의 제스처를 용납하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철저하게 심문하고 처벌하도록 요구하는 부류인 것이다.

리버럴한 것은 이제 상상적 매혹이 아닌 참혹한 리얼리티였다. 가족, 공동체, 친구, 이웃, 직장, 학교, 사회가 내적으로 침식되어 있었다. 모두가 리버럴하고, 모두가 자신을 기막히게 표현하고, 모두가 미적이고, 모두가 예술적인 세계. 그러나 기실 모든 것이 썩어가는 악취를 풍기는 시대.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짐작하기 어려워진 시대. 하나의 노래와 하나의 세계가 단절되어갔다.

‘바로 그 노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로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없을 때, 나는 할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으며, 누구 앞에 존재를 걸고 나설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떼로 익사하는 와중에 가진 자들은 이를 방조하면서 기회주의적으로 피신하는 야수성. 죽음을 방기하는 반인본주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 되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대체의 가장 명백한 결과는 공공영역의 민영화 내지는 사유화에 그치지 않고, 바로 ‘자기 경영’이나 ‘자기 계발’이라는 익숙한 말들이 나타내듯이 주체성 자체의 사유화이자 사유화된 주체성의 생산으로 확장된다.

사고는 ‘사실’과 관계하는, ‘처리’와 ‘복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건은 ‘진실’과 관계하는, ‘대면’과 ‘응답’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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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pose Driven Life (Paperback, 영국판) - What on Earth Am I Here For?
릭 워렌 지음 / Zondervan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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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군주론 완역에서 완독까지 1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종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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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재미는 없었지만
유명하니까 한번쯤 읽어보고 싶었다. 인문고전 추천 1번 이길래..
자기계발서의 고전 같은 느낌이다.
지금 무시하는 자기계발서 중에 핫한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고전으로 남을지도 모를일.

인간사에 대한 시니컬한 통찰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옳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해야 한다

인간을 짐승만큼 사납고 위험하지만 그보다 더 탐욕스럽고 잔인한 존재로 그렸다.

인간은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자유 의지를 지닌 고귀한 존재였다.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혼란이 지속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지연시킴으로써 그저 당신에게 불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고 가서, 사정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만큼 더 나쁘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강력해지도록 원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몰락한다

불만을 가진 자와 변화를 갈망하는 자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당신이 획득한 것을 보유하고자 할 때는, 당신을 도와준 사람들과 당신이 진압한 사람들 양쪽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

당신은 그들을 만족시킬 수도 파멸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회가 가기만 하면 당신은 그 국가를 잃게 될 것이다.

점령당하고 나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또는 그 점령으로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지에 상관없이, 이것들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어떠한 조치를 취하든, 그 주민들을 분열시켜 찢어놓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자유의 이름과 전통의 방식을 잊지 않을 것이며, 기회가 나기만 하면 이런 대의를 위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잔혹한 행위는 한번에 저지르고 끝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은 그것의 가혹함을 덜 느끼고, 감정도 덜 상하게 될 것이다. 반면 시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그 향취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혜택만큼이나 자신이 베푼 혜택에 의해서도 구속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요컨대, 다른 사람의 갑옷과 무기는 당신에게는 너무 헐겁거나, 너무 무거워 짐이 되거나, 너무 꽉 조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의 힘에 기초하지 않은 권력에 대한 명성만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

후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탐욕스럽다는 평판을 듣게 되어, 미움을 받으면서 비난도 받게 되는 것보다는, 인색하다는 평판을 얻어 비난을 받을지라도 미움을 사지는 않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롭다.

사람들이 한 약속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다른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는 군주는 몰락하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를 가할 때 덜 주저한다. 사랑은 보답이라는 끈으로 유지되는데, 인간은 비열한 존재라서, 자기만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끈은 끊어지고 만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유지되는데, 처벌에 대한 공포는 결코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은 금방 잊어버려도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잃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나는 요새를 세우는 사람과 세우지 않는 사람을 모두 칭찬하지만, 요새를 믿고 인민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난할 것이다.

군주는 또한 진정한 친구이자 진정한 적일 때 존경받는다. 다시 말해, 거리낌 없이 분명하게 한쪽을 지지하고 다른 한쪽에 반대한다고 자신을 드러낼 때 존경받는다. 이러한 방침은 중립을 지키는 것보다 언제나 유익할 것이다

좋은 조언은 그것이 누구에서 나오는지 상관없이 군주의 분별력에서 비롯한 것이지, 군주의 분별력이 좋은 조언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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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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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기간에 읽는 책선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게으른 활자중독자는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는다.
너무 몰입도가 높은 책 빼고
너무 진지하거나 어려운 책 빼고
그냥 무난한 거 아무거나.

*
장면 장면, 영상을 연출하는 듯한 묘사를 한다.
마치 영화를 찍는 사람이 쓴 글 처럼
머릿속에 장면이 잘 그려지고 책장이 잘 넘어가는 편한 글.
그리고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살짝 막장의 연애소설.

*
그래. 연애소설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연애소설인 줄을 미리 알았다면 안 읽었을 거야.
일본연애소설은 잔잔한 척 하면서 사람 기빨리게 하는데 전매특허가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딱히 희망적인 메세지를 던지지도 않으니까.

그런 일본소설 특유의 감성을 좋아했던 한때도 있었지만
나이 먹을 수록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생각만 들어서
잘 안 읽게 돼.

*
그래서 책장이 잘 넘어가긴 하는데 넘어갈 수록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을까아...
그런 회의감이 드는 거야
남의 지루한 연애 훔쳐보는게 뭐 재밌다고.

*
특히 나는 여성 등장인물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참 불편했다.
등장인물들은 다 하나같이 미인이고 그녀들의 외모에 대해 참 자세히도 묘사한다. 유독 여자들만 외적 묘사에 치중한다. 꼭 필요한 묘사였을까. 의문이다.

이제와서는 남주인공 시각에서 소설이 전개되니까
남주 시각에서 자연스러운 것일 지도 모른다는 관대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ㅎㅎ (이렇게까지 철저히 늘 모든 여자들을 성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보편적인 남자들의 속성이란 말인가 ㅎㅎㅎ)

읽고 있을 때는 여성캐릭터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시작될때마다
양판소에서 새 등장인물 나올 때마다 키는 몇이고 눈색 머리카락 색이 뭔지부터 설명해주던 게 생각났다.
뭐야 이건. 아저씨들을 위한 할리퀸 연애소설인가 싶기도 했고.

(이건 진짜 여담인데 일본소설에서는 유난히 여자들의 패티큐어에 성적 의미를 부여하는 걸 자주 본다. 아니 도대체 왜 ?
이 인간들은 집단적 성도착증이라도 있는 것인가?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만큼이나 강한 거부감이 있는데
그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여성을 향한 시선 - 성적대상화에 대한 거부감은 아닌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어갔던 건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사랑을 향한 기대도 없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내겐 없는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고서
그렇다고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뭐하나 적극적으로 애쓰는 것 없이,
한번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먼저 잡아본 적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질 때 조차 붙잡기는 커녕 도리어 더 밀어내 버리는,
좋은 것을 공유하며 사랑하길 갈망하면도
싫은 것을 공유하는 사랑에 안주하고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정신과의사 주제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주인공.

그런 무색무취의 삶이 나와 닮은 점이 있다고,
또 어쩌면, 최근에 내가 잃어버린 그 사람과도 닮은 면이 있다고 느껴서.


그리고 반복되는 메세지
- 과연 함께 하는 사람의 사랑을 어떻게 확신할수 있겠는가?
그 마음의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랑의 뜨거움은 한순간에 지나가는데 .
상대방은 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우리는 스스로 알지 못하지 않는가 ?
그 의문에 공감하는 면이 있어서.


*
후반부로 가면서 좋았다.
잔잔하고 지루하게 끌고 가다가 후반부에 빵 터뜨리는게 이 작가의 특기인가 싶을 정도로.(이하 스포)











하루가 죽었다는 게 밝혀지고 약혼녀가 사라지면서부터의 전개가 좋았다.

일본소설 읽을 때 종종 갖는 감정
- 그래서 뭐 어쩌라고 ? 란 의문을 남기지 않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네가 잃어버리고 놓친 것을 다시 찾으라고.
너는 마치 처음부터 그런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런 뜨거움이 네게 있었다고.

그런 메세지를 던져주어서 난 좋았던 것 같다.

죽은 첫사랑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나
첫사랑과 의미가 있었던 장소 - 심지어 인도 해변에서 사라진 약혼녀를 재혼하는 결말은
음. 지나치게 작위적인 만화적 연출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의 메세지를 던지며 끝맺는 결말을 좋아한다.

교섭 끝에 사과 하나를 획득한 그녀가 후지시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내기하자!"
별안간 큰 소리를 지르는 야요이를 보고 놀란 후지시로가 숨을 집어삼켰다.
사육사도 난처해하며 주위를 신경쓰듯 둘러보았다. 원숭이들이 새 사과를 노리며 무리지어 다가왔다.
"이 사과를 어느 원숭이가 먹을까. 둘이 내기해."
야요이는 딱히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뭘 걸죠?"
기세에 눌린 후지시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사과를 공중으로 한 번 던졌다 다시 잡은 후 대답했다.
"만약 내가 이기면, 다음 주에도 후지시로 군을 또 만날 거야."
"내가 이기면?"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해. 어때?"
"왠지 가슴 아픈 내기네요."
"그래, 가슴 아프지. 그래도 할 거지?"
"그렇게 중요한 걸 원숭이가 정하게 해도 될까요?"
"그럼, 어떻게 정하면 좋을 것 같아?"
"하긴, 원숭이가 정해주는 게 딱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가슴이 떨리고, 웃음이 솟구쳐 올랐다. 역시 야요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는 눈빛. 장난스럽게 웃는 아름다운 입술. 뜨거운 감정을 품고 있는데도 더욱 차갑고 맑아지는 목소리. 그녀의 이런 면을 자기가 원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야요이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독수리 발톱처럼 펼쳐지며 사과를 거머쥐었다. 미래를 움켜쥐는 것 같은 그 손가락 속에서 사과가 빨갛게 반짝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그래요.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고독해진다고.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니까."

나는 사랑했을 때 비로소 사랑받았다.
그것은 흡사 일식 같았어요.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똑같이 겹쳐진 지극히 짧은 한순간의 찰나.
거역할 수 없이 오늘의 사랑에서 내일의 사랑으로 변해가죠.
그렇지만 그 한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두 사람만이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난 생각해요.

잰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자, 짙은 남색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다 끝에 작은 섬에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푸른색과 흰색과 오렌지색으로 그러데이션이 진 하늘이 성스러운 석상의 실루엣을 그렸다. 인도양과 아라비아해와 벵골만, 세 해류가 교차하는 성지야. 그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완만하게 경사진 해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어스름한 모래사장에 모인 수천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모래사장에 늘어선 사리를 입은 여성들. 파도가 밀려드는 물가에 서서 바다에 몸을 절반쯤 담그고 수평선 끝을 바라보는 수도승들. 군중속에 뒤섞인 후지시로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끝으로 흐릿한 빛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에 모여든 새들처럼 움직였다.

수평선이 붉은 빛으로 스며들어 흔들리더니 아침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빛의 화살이 눈 속으로 날아들었다. 땅을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환호송도 노호도 아니다. 너무나 성스러운 것을 접한 인간만이 낼 수 있는 소리의 집합. 군중이 일제히 아침 해를 향해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수도승이 거친 파도를 맞서며 잇달아 바다로 들어갔다. 아침햇살을 받아 에메랄드그린 색으로 바뀐 바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앞에 있는 거대한 석상의 온화한 미소가 후광과 함께 서서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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