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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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알고 있어요. 공평해 보이지 않겠죠. 하지만 인생이란 게 원래 공평하지 않은 거니까
그쪽도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최은영 작가님이 말한 것처럼 호감도, 감정 이입도 되지 않는 여주인공이란 말에 동의한다. 많은 단편 중 『자식들은 안 보내』 란 작품밖에 못 읽었지만 말이다. 불공평한 것을 알면서도, 힘들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폴린은 지금 칭얼대는 어린 소녀들을 신경 쓰기 바쁘고, 시부모님과 남편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게 습관처럼 평범한 나날이라 느껴왔으니까.

그녀가 제프리와 바람을 피운 건, 처음으로 해본 능동적인 일이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심하면 자식들조차 그녀를 멀리할 수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찾아온 사랑에 직접 달려간다. 결국 브라이언에게 '자식들은 안 보내' 매정한 말을 듣고 그녀가 얻은 건, 자유였을까?

제프리와의 인연은 길지 않았음을 뒤에서 예측해 볼 수 있다. 성인이 된 딸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행이라 느껴졌던 것은 담담해진 폴린의 태도였다. 독박 육아를 감당하면서도, 시부모의 지적을 들으면서도 그저 주어진 일이니 행하는 무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애써 붙잡지 않으려는 초연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평범함 속엔 익숙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찐득하게 달라붙은 껌처럼 쉽게 떼지지 않고 끈적함을 남긴다. 내가 폴린에게 느꼈던 찝찝함은 그런 종류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느꼈던 감정이었다. 훅 치고 들어오는 말과 행동, 각종 사건들 앞에서 내가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세요'라고 해본 적이 있었던가. 충격에 잠시 황당해서 입을 떼지 못했다.


이건 극심한 고통이다. 만성적인 고통이 될 것이다. 만성적이라는 말은 영원하긴 하지만 한결같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매 순간 느끼지는 않겠지만, 고통 없는 상태가 여러 날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얻은 그것은 파국으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그 고통을 무디게 하거나 유배시키는 요령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순진무구하거나 미개하여, 이 세상에 이렇게 오래가는 고통이 있다는 걸 모른다. 혼자 되뇌어라. 어차피 아이들은 언젠가는 떠난다고. 아이들은 자란다고. 엄마라는 존재 앞에는 늘 이렇게 혼자 겪어야 하는 조금은 어리석은 고적감이 기다리고 있다고. 아이들은 이 시간을 잊을 테고, 어떤 식으로든 당신과 결별할 것이다. 아니면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는 순간까지 당신 주변에 머물 것이다. 브라이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 그 일이 그저 가슴 아픈 과거로만 남고 더는 현재의 것이 될 수 없을 때까지 그걸 끌어안고 살면서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p. 61~62)


'착한 여자'란 프레임안에는 수동성이 내포되어 있다. 고통의 현실은 반복된다.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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