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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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그러니까 매콘도가 아니라 마콘도이던 당시에는

 

『금강경』에 보니 이런 구절이 있네요.

여래가 말하는 세계는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이다.

인상적인 구절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오래 서성이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이라니? 붓다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걸까요.

어렴풋이나마 문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그것이 멋진 문학이라면 거기엔 하나의 완벽한 세계가 구현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치고 문학 이상의 것이 또 있을까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하나의 완벽한 세계였습니다. 완벽함을 넘어 이 세계는 통찰 같은 것을 제게 떠다 안겼지요. 독재 치하? 트루히요? 푸쿠? 우리에게도 이런 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기를 다룬, 이런 소재를 다룬 문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세계를 비교해 보세요. 이쪽 세계엔 고뇌하는 굳은 얼굴과 비장미를 풍기는 까칠한 얼굴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저쪽엔 탐하고 발산하고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인물들이 우글거립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같은 데 말이죠. 왜 이렇게 다르죠?

세계는 하나의 기억이자 해석이다. 저는 이런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같은 상황을 겪고도 그 기억과 해석을 풀어놓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아니, 그보다는 애초에 그 상황을 겪고 있는 그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오스카도 말하잖아요. 세상은 그가 읽는 판타지소설에 다름 아니라고. 그래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임을요.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마콘도들 혹은 매콘도들, 그것을 통칭해 세상이라 함을요.


푸쿠 대 사파

삶은 고해의 바다, 라고 말할 때의 그 고해. 그것이 푸쿠가 아닐까요. 출판사에서도 그 점을 간파하고 책 뒷면의 광고 문구를 이것으로 확정지은 듯 합니다.

저주 따윈 믿지 마. 삶,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래요. 삶,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하루는 온갖 푸쿠들로 우글거리고 이점은 내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삶을 이어가나요? 그건 삶이 푸쿠로 가득한 것과 마찬가지로 삶이 사파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푸쿠로 가득한 동시에 사파로 가득하다?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카브랄 가의 사람들이 이점을 몸소 설명해주었습니다.

벨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옥수수 밭에 쓰러졌죠. 이곳까지 그녀를 이끈 힘은 푸쿠였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에 관해 생각합니다. 트루히요의 여동생이 보낸 악당들? 푸쿠의 정체는 그들이 아니었죠. '또 한번 당했다는 사실' '이번에도 갱스터와 산토도밍고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푸쿠의 정체였습니다. 즉 자신의 어리석음 말입니다. 벨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부끄러움이, 그녀의 깨달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요.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사파가 아닐까요. 바로 그 순간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푸쿠는 맥을 못 춥니다. 거기다 우리에겐 '너의 푸쿠''에 힘을 실어줄 사파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벨리에겐 라 잉카의 기도가 있고 롤라에겐 벨리의 기도가 있고 오스카에겐 롤라의 기도가 있습니다. 푸쿠에 대항하는 최고의 역주문, 우리가 가진 최고의 사파는 사랑이며 기도입니다. 오죽했으면 우리의 오스카가 여기에 목숨을 바쳤겠습니까. 푸쿠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또 그만큼의 사파는 늘 존재하고, 그래서 오늘도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입니다.

녀석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 여자랑 키스했어

주노 디아스는 유능한 변사입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이야기 주머니를 가슴에 품고 있는 남자인데, 그것도 잘 생긴 남자입니다. 그가 소설을 쓰고 있는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입구는 좁은데(글은 한번에 한자씩 써야 하니까요) 주머니 안에서는 이야기들이 서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형국. 그러니 그의 손이, 그의 펜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빽빽한 본문이, 이 숱한 괄호들이, 이 엄청난 주석들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작가의 근성을요. 그가 진정한 이야기꾼임을요.

삶의 고통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입니다. 갱스터의 아내가 누구인지 밝혀지던 순간을 기억하세요? 저는 대굴대굴 구르고 말았어요. 갱스터의 아내는, 하고 그는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저쪽을 향해 외칩니다. 어이, 거기, 드럼 좀 쳐주지? 관객들은 배를 잡고 웃는데, 변사는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갱스터의 아내는, 빌어먹을 트루히요의 여동생이었다!

덕분에 도미니카노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 주머니 속에 갑갑하게 갇혀있을 사람들이 못 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정이 그들의 것이니까요. 그래서 작가의 손이 그처럼 바빴던 겁니다. 독재자는 스물 일곱 발의 총성에 쓰러졌지요. 작가는 이 숫자에 대해 참으로 도미니카스러운 숫자가 아닌가!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이해했고 그것으로 이 소설을 읽은 보람은 충분했습니다.

오스카, SF와 판타지의 광팬이자 꼴통스런 만화와 롤플레잉 게임이 삶의 전부였던 뚱땡이. 하지만 그 역시도 결국엔 도미니카 남자였습니다. '따끈따끈한 최신 꼴통 제품' 보다도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여자입니다. "녀석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 여자랑 키스했어." 이 대목을 읽으며 미소 짓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요. 오스카가 총각 딱지를 떼고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요. 그의 죽음보다도 이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오는 역설! 섹스와 목숨을 바꾸었다는 이 역설! 오스카 와오의 삶이 짧고 놀라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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