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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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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벌써 1년 전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키워온 강아지가 작년 겨울 즈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는 13년 정도의 세월을 녀석과 함께 보내면서 참 해주지 못한 것이 많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그 애를 생각하면 생각보다 눈물이 먼저 줄줄 흐른다.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면서도 어쩌면 이해하지 못 하는 감정이 항상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솟아나는데, 아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사실, 사람이나 강아지나 움직이는 단백질 덩어리다.(물론 나는 이 말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냉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들린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 분해될 단백질들의 커다란 결합인데, 우습게도 우리는 그 단백질의 결합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다. 나는 배우가 아닌지라 의도적으로 감정을 연기할 수는 없지만, 이 감정을 순간적으로 생성해낼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대상은 더 이상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그건 내 세계의 일부이고, 나의 파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미 떠나버린 녀석을 우리 가족의 일부로, 우리가 사랑하기에 어떤 유일성을 획득하게 된 일부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 애가 나의 동생이고, 부모님의 셋째 아이라고 의미화했다. 그래서 결별의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슬퍼졌지만, 사실 이 의미화가 없었더라면 우리와 그 애는 함께 살 수 없었을 거다. (사실 그 애는 문제 덩어리였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물리적 세계와 구분되는 이 의미의 세계가 곧 인간, 언어, 문명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살며, 의미가 없으면 죽는다.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참 신기한 동물이다. "왜 사는가?"하고 묻기 때문이다.

덧붙여, 무언가를 의미화해야한다면, 내게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수록 더 극적으로, 더 영향력 있게, 더 거대한 무엇으로 의미화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사실 어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을 끌어들여 인간은 '그 무엇'으로 만든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에 인간은 이름을 붙인다.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야기할 것들은 너무나 많다. 소설을 잘 이해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일 테고, 아마도 오독으로 범벅된 독서의 시간을 보낸 탓일 테다. 기본적으로, 『익사』는 사소설적 성격을 가진다. 사실 읽는 내내, 이게 소설인가 오에의 수필인가가 헷갈릴 정도다. 소설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인은 오에 그 자신이다. 소설은 어떤 사건을 상정하고 그걸 중심으로 기-승-전-결 화 되어 구성되어있지 않다. 보다 정확히, 아마 그렇게 구성되어 있을 테지만 독자에게 진정한 '메인'사건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소설 제목이 『익사』인데, 정작 『익사』소설은 소설의 중반부 정도에 포기 된다. 그리고 새로운 일들이 점차점차 서로 아귀를 맞추어 가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떠올랐다. 여러가지 형태로 제시되는 온갖 기법들의 콜라주처럼 보였고(극, 일기, 일반 서술, 마치 '다들 알지?'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엘리엇이며 자신의 옛 작품을 제시하는 방법 등), 소설 자체가 『익사』소설이라는 소설을 쓰는(어쩌면 쓰지 않음으로써 쓰는, 그리고 실제로도 바로 그러한) 방식에 대한 일종의 메타 픽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이야기였고, 마치 의식의 흐름과 주변의 신변잡기적인 일이 맞물려 돌아가며, 수핗처럼 느껴지는 일이 잦았다. 한국 소설가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가 가끔 이게 소설인지, 작가의 잡담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꼭 그런 그느낌이었다.

 

그런데 계속 읽으면서, 이 소설은 형식적으로 그러한 방식을 취하고 있을지 언정 사실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이 '의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 모든 소설에 적용되는 이야기이겠지만.) 소설에 나오는 다이오씨, 코기토 자신, 그리고 우나이코 및 다른 사람들 모두 계속해서 무언가를 규정해야한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자기자신까지도. 그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코기토는 익사소설을 통해 사실 규정해야한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을 했는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당연히, 그는 그것을 극적으로 만들고 싶다. 무언가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인간이라면 그렇다. 후반부 다이오씨가 보여주는 모습 역시 비슷하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 나는 어떤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다' '나는 ~한 인간이다'라는 자기 규정이 부재하거나 무너졌을 때, 인간은 휘청거린다. 『익사』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계속해서 해나가기 위해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진 연극을 하면서 무언가를 '재현'하고 무언가를 보이려 하며, 그게 무엇이었는지(이를테면 우나이코와 큰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양 쪽의 시각처럼)를 계속해서 확실하게 하려는 행위로 『익사』는 가득 차 있다. 나로서는 노년의 소설가가 아직까지 이런 물음을 던지고 치열하게 탐구할 수 있다는 게 놀랍게 느껴지는데,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노인의 심경에 대한 묘사가 이런 놀라움을 좀 더 강하게 만든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이의 사람도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야 하는 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오에가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고, 의미화하려고 쓴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뒤에 서서 재현하고 그려보면서 '그것은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과정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안타까운 점은,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썼다보니 접근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일본소설을 번역한 것이라 더욱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쇼와정신, 메이지 정신 등등의 단어는 확실하게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에서 만연해있던 분위기, 그 때 사람들의 반응 역시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그 상상하기 어려운 것을 체험 시키는게 세계문학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정리하면서도, 사실 이게 오독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할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다. 지난한 독서의 과정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없을 것 같다. 일부러 뒤에 붙어있던 해설은 읽지 않았다. 아마 그것을 읽는다고 해도, 내가 직접 읽고 이것이라고 규정한 생각과 다르다면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식으로 읽은 『익사』는 참 어딘가 쓸쓸하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헤매는 사람들의 몸부림 같은 기분이 든다. 최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꽁치의 맛>을 보며 느꼈던 쓸쓸함과 좀 비슷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일본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신기한 일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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