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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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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그 중 특히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 중 이른바 '교양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나는 마치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기분이 든다. "현대인들 중 속물 아닌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글쎄, 여기서 말하는 '속물'을 정확히 무어라고 지칭해야 할까? 선한 척 하지만 사실 선하지 않고, 도덕적인 체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심지어는 '도덕적'인 것 조차 자신의 특성과 명예가 되기 때문에 선택할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 혹은, 우리가 흔히 '속물'을 지칭할 때 말하듯 교양이 없고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

 

나는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사실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가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대중소설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는데, 그래서 그런 쪽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기도 하다. 현실에 숨쉴 것 같은 속물, 나를 보는 것 같은 인물의 허영과 이중성을 밀고하는 듯한 글을 읽는 것보다, '캐릭터'의 완전하고 논리적인 세계를 보는 게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앞면은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으나..>

 

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는 결단코 그런 위안이 되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끈질기게 문학의 본분을 실현하려는 듯 독자를 붙잡는다. 약 30편에 달하는 단편을 묶어둔 단편집이니만큼 읽다보면 저자인 오코너 자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얼핏 이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내가 상상한 오코너는 이런 이미지였다.

 

얼굴 하얗고 창백한데 동그란 알이 달린 1900년대 지식인풍 안경을 쓰고 늘 책을 보는 머리 좋은 여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는 얼굴로 앉아 '그게 진짜 그런가?'하고 딴지 거는 사람. 세상이 아름답다고는 도통 믿을 수 없고, 사람의 미덕 역시 믿지 못하며,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낭만적 인간형 따위는 우습게 생각하는 여자.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플래너리 오코너>를 한 번 손에 들고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소설을 전부 읽어나가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평가조차도 후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코너의 단편에는 몇몇 소재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시골-도시','검둥이','기독교','예수' 등이 단편적인 예시다. 오코너는 이런 소재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활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전개시켜 나간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녀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알고 있다'는 인간의 자의식과 자신감을 가볍게 비웃는다. '선(善)'하면 복을 받는다는 순진한 권선징악 정신이나 '선' 혹은 "사랑"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리라는 생각 역시도 조소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오코너가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사랑이나 정의감으로 구원받는 얘기? 그건 소설 속에나 있는 거고."

 

그래서일까?

분명히 상징이 들어가 있고 부조리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으로 점철되어있는 소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오코너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을 읽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두께가 어마어마하다. 한꺼번에 다 읽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뿐 더러 좋은 글임에도 질리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탕 아껴먹듯 읽어야 한다! ㅠㅠ>

 

그 어떤 단편에서도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맞춰 타인을 재단하고 '상상'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기대며 예상은 모조리 배반당한다. 검둥이는 모두 아틀란타에서 왔다, 검둥이는 자신보다 아래다, 라고 생각한 노인은 옆집 이웃으로 뉴욕 출신 흑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은 우월하고 선량한 백인이라 생각하던 부인은 자신이 '백인쓰레기'라 평한 여자를 앞에 두고, 여대생에게 "지옥"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듣는다. 플로리다에 범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플로리다 여행일정을 취소한 할머니는 자기 고집대로 가족들을 이끌고 가지만, 범죄자는 플로리다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 앞에 나타난다.

 

뿐만인가?

'사랑'으로 뛰어난 아이에게 기회를 주려 했던 선생은 아이의 비웃음과 조롱을 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와의 커넥션 마저 잃어버린다. '추방자'를 데려와 농장의 일원으로 삼자 도리어 농장에서 누군가는 추방되고, 추방자만 추방시키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건만, 추방자의 추방과 함께 모든 것의 몰락이 찾아온다. 오코너의 소설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삶의 아이러니, 사람들의 이중성, 그리고 완고한 기독교적 믿음이 가진 허상성을 가감없이 다룬 오코너의 언어 하나하나가 신랄하고, 그걸 읽어나가다보면 뭐랄까 좀, 씁쓸해진다.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걸까?" 이 질문이 절로 나오게 하는 힘이 소설 안에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글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힘들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대안이 있음을 말하는 소설이 있는 반면, 오코너의 소설은 대안이 아니라 그저 후벼파고, 이면을 바라보게 하고, 문명 안에서 "푸줏간"과 "경찰관"의 존재 덕에 유지되는 이 거대한 인간사회라는 실험관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뺨을 내리치는 소설에 가깝다.(물론 푸줏간과 경찰관은 콘레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수록된 단편의 수가 많다보니 한꺼번에 읽으면 약간 버거워지고, 세상이 싫어지고, 그냥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몰려오게 된다는 점! 하나하나 따로따로 보는 미덕이 필요하다. 나는 하루에 6-7편씩 읽었더니 나중에는 어으어...이런 상태가 되어서 무슨 괴기 독서몬 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들을 몇 가지 언급하자면,

 

<좋은 사람은 드물다> <불 속의 원> <인조 검둥이> <추방자> <좋은 시골 사람들>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 <계시>

 

특히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가 가장 인상 깊었다. 인간의 이성, 사회에 팽배한 믿음, 사람에 대해 문명이 전제하는 것들을 모두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당연히 응당 사람이라면~해야지! 하는 생각을 뒤집는 솜씨도 일품. 기독교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부분 자체에도 공감 가는 구석이 많았다. <추방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사람들이 미국에 일꾼으로 오게 된 상황을 다뤘는데, 인간의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사람(이 개념을 뭐라 해야할지. 서벌턴이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은데..), 그 층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던 소설이다. <계시>도 마찬가지.

 

읽으면서 계속 함께 생각났던 다른 작품들이 꽤 있는데,

먼저 <케빈에 대하여>와 <다섯번째 아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이 그저 존재하는 '악'과 같은 아이와 사회화된 사람 사이를 다룬 두 명작이 계속 떠올랐고,

조지프 콘레드의 <어둠의 심연>(영화화한 <지옥의 묵시록>도) 역시 간간히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최근 읽었던 한국 단편 소설로는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를 같이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그러고보니 김연수 작가가 이 오코너의 소설 중 <좋은 사람은 드물다>를 추천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음, 확실히 읽어봄직 한 소설. 내가 느끼기로는 현대소설 중 오코너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은 정말 많은 것 같다. 다만 오코너처럼 표현하는 작품은 오코너의 것일 뿐. 그리고 그건 어떤 작품 간의 우열의 문제는 아닐테다.

 

벅찼던 독서량에 부지런한 독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준 책에 감사를 표한다. 흑.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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