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 5주

의뢰인 (2011)
감독 : 손영성
출연 : 하정우, 박희순, 장혁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으로는 죽은 여자의 남편이 지목된다. 아무도 들어오고 나간 흔적이 없는 밀실, 그리고 사라진 시체, 지문 조차 남지 않은 사건 현장. 증거는 없으나 여러가지 정황들을 이유로 그를 범인이라 확신하는 냉철한 검사 안민호. 그리고 용의자 한철민의 변호를 맡게 된 것은 날라리 같지만 나름의 소신과 실력은 있는 변호사 강성희이다.  
강성희는 처음에는 한철민의 무죄를 믿기 보다는, '이길 수 없는 사건에서 승리한다'는 목적이 확고했었다. 하지만 무표정하고 감정을 알 수 없지만 묵묵히 자신의 결백과 절실함을 드러내는 한철민을 보며 점차 혼란스러워진다. 그가 정말로 범인인 것일까? 한편 검사 안민호의 태도 역시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안민호가 한철민을 잡는데에 매달리는 것은 순수하게 검사로서의 정의실천인 것인가, 아니면 라이벌에 대한 승리나 그로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사적인 심리로 인한 집착인가. 증거조차 없는 사건에서 해석하기에 달라질 수도 있는 정황만으로 누군가의 범죄를 단정짓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한철민처럼 범인스러운 여러 조건과 정황을 지녔다면 더더욱 우리는 선입견으로 그를 범인으로 모는 판단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결백 역시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무기력하고 무표정한 한철민이 자신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억울하다는 감정을 극적으로 터뜨리는 순간, 우리들은 거기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의뢰인>은 법조인으로서의 근본적인 딜레마의 하나를 보여준 영화이다. 주제나 안민호와 강성희 전혀 다른 두 캐릭터는 꽤 흥미를 끌었지만, 어딘가 '이것이 한국의 법정스릴러다!'라는 느낌보다는 헐리웃의 익숙한 법정 스릴러물들의 요소요소를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점은 아쉽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만은 정말 최고였던 영화.

그런데, 안민호와 강성희의 대결과 특히 안민호의 석연찮은 행동들로 초반에는 관객의 눈길을 돌리게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점차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철민의 캐릭터에서 웬지 모르게 한 영화가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 

프라이멀 피어 (1996)
감독 : 그레고리 호블릿
출연 : 리처드 기어, 에드워드 노튼 

존경받는 카톨릭의 대주교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나고, 현장에서 피투성이인 채로 도망가던 19살의 소년 애런 스탬플러가 용의자로 잡힌다. 패배 따윈 모르는 잘 나가는 변호사 마틴은 무보수로 애런을 변호하겠다고 나선다. 직접 만나본 애런은 그런 끔찍한 수법으로 주교를 살해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심하고 연약한 소년이다. 게다가 그는 사건에 대한 기억도 없다. 애런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증거들 속에서, 마틴은 현장에 제3자가 있었으며 애런은 어린시절 학대로 인한 기억상실임을 강조하며 맞선다. 이번에는 증거는 있지만, 자기를 거둬 준 아버지같은 분이라는 주교를 과연 이 겁에 질린 소년이 그렇게 살해했다는 게 정황상 믿어지지 않는 케이스다. 애런은 유죄인가?  
그런데 애런에게는 사실 주교를 죽일만한 동기가 있었다. 이 사실에 마틴이 좌절하는 순간, 극적으로 또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존경받던 주교가 더러운 이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소심한 소년 애런은 '로이'라는 이름으로 공격적인 또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애런은 로이로 변해있던 동안의 기억이 없는 다중인격장애자였던 것이다. 주교의 더러운 이면과 애런의 다중인격 장애. 그렇다면 이제 애런은 무죄인가?
법정은 사실들에 따라 합당한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이 판단이 온전히 정의와 진실을 밝혀낸 밝혀낸 결과라고 얼마나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프라이멀 피어>의 그 유명한 반전 결말과 변호사-리처드 기어와 범인-에드워드 노튼의 마지막 표정은 끝까지 관객에게 이 의문점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의뢰인>과는 사뭇 다른 결말과 그로 인한 마음의 부담도 달라지는 영화. 역시 불꽃튀는 배우들의 명연기를 볼 수 있기도 하니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데이비드 게일 (2003)
감독 : 알란 파커
출연 : 케빈 스페이시, 케이트 윈슬렛, 로라 린니

이번에는 변호사가 등장하는 법정 스릴러는 아니지만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기자가 등장하여 한 사람의 유죄와 무죄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젊은 나이에 교수의 자리에 오를 정도의 명석한 인재이자 열렬한 사형폐지론자 데이비드 게일은, 함께 사형폐지 운동을 한 '데스워치'의 동료이자 친구인 콘스탄스를 강간하고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형집행 3일전 유일하게 인터뷰를 하겠다며 여기자 빗시를 지목한다. 주위에서 뭐라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소신파 기자 빗시는 그의 유죄여부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또 무언가 의심스러운 미행과 일련의 상황들이 일어나면서 혼란스러워 진다. 
<프라이멀 피어>의 애런처럼 데이비드 게일은 빼도박도 못할 강간과 살해의 증거들이 남아있었으며, <의뢰인>의 한철민처럼 정황상으로도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처지이다. 한차례 강간 사건으로 누명을 썼다 풀려난 적이 있는 게일은 그 이후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도 외면받고 사회적으로도 오직 '강간범'으로만 낙인찍힌 신세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게일이 차분하게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군가의 사적인 복수심과 사람들의 꽉막힌 선입견만으로 얼마나 사실이 왜곡되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정말 무죄인 것일까? 그는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빗시를 부른 것일까? 
이상하게도 빗시에게 조금씩 전해지는 사건의 진실들... 그것을 열성적으로 추적해내는 빗시와, 그와는 반대로 억울한 무죄임을 말하면서도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일.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의 결말은 <의뢰인>이나 <프라이멀 피어>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만, 정의와 진실의 이름 앞에 한 사람의 유죄와 무죄를 결정짓는 일의 무거움에 대해서는 세 영화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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