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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비밀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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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지구의 역사에서 일어난 획기적 사건들-최초의 대규모 화산 분화에서부터 복잡한 생명체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은 모두 기체의 행동과 진화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일어났다 기체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체 대륙의 구조를 바꾸었고, 액체 바다를 변화시켰다. 지구의 이야기는 '곧' 기체의 이야기이다. (…) 다시 한번 입 앞에 손을 갖다 대고 그것을 느껴보라. 우리는 한 모금의 숨결에 온 세계를 담을 수 있다.

p.21

잘 쓴 비문학은 소설보다 재밌다는 걸 알게 해준 책이었다. '기체'를 주제로 물리, 화학, 지구과학 이론 유기적으로 엮어낸 것도 대단했고, 그런 과학적 사실과 관련된 '역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재미있으면서 깊은(정규교육과정을 열심히 들은 사람도 새로운 사실을 얻어갈 수 있는) 과학 교양서는 처음이다! 재밌는 책들은 많았는데 이정도로 재밌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재미있는 교양서이다. 최근에 읽은 아나톨 프랑스의 책에서 '명료함은 담화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적절한 질서와 지극한 경제성을 유지해야만 성취된다'라는 구절을 인상깊게 보았는데, 이 책이 그 비유에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챕터 당 3~4개의 과학적인 사실과 또 서너개의 역사적 이야기가 길게 소개되는데, 조잡하기보단 마치 하나의 이야기(실제로 이 작가가 그렇게 엮어내니 하나의 이야기라 칭해도 상관없다)처럼 명쾌했다.

이 책은 공기의 변잡스러움을 다룬다. 공기의 물리적 성질, 공기를 이루는 원소들의 화학적 성질, 지구 공기의 역사 등등.. 공기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는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공기, 흙, 물, 불을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원소'로 여겼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은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공기 중 어떤 성분은 불에 타기도 하고, 어떤 성분은 불에 타지 않는 등 '공기'가 다양한 성분으로 쪼개짐을 발견했다. 헬몬트라는 연금술사는 이렇게 다양한 성분을 가진 공기를 다루기 위해 '가스gas'라는 단어를 만들었는데, 이 단어는 '혼돈'을 뜻하는 'chaos'에서 온 것이다. (p.116) 공기는 그 유래부터가 다루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성질을 뜻했다니 정말 재밌으면서 딱 들어맞지 않는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산소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였다. 산소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에 대한 주장은 분분하다고 한다.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약제사였던 셸레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발견을 출판하기 전에 죽게되어 '산소 발견인'으로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리고 조금 뒤의 시점에 가난한 성직자이자 실험가였던 프리스틀리 또한 독자적으로 산소를 발견했다. 그는 산화수은을 가열하니 수은에서 투명한 기체가 나와 솟아오르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산소라는 새로운 기체를 발견한 것을 모르고 '플로지스톤'(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체가 있는 물질)이라는 당시의 과학개념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다 그는 파리 여행에 가서 (그 유명한) 라부아지에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과학자로만 알고 있는 라부아지에는 사실 프랑스에서 징세를 담당하는 부자였다고 한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연구를 듣고 본인도 기체 연구를 시작한다. 당시엔 플로지스톤 설이 대세였다고 하는데,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설을 검토해보면서 그것이 비논리적임을 발견했다. 만약 플로지스톤이 물리적 실체가 있다면, 무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무나 양초가 산소와 결합해서 탈 때는 무게가 줄어들고, 금속과 결합해 타면 금속의 무게는 늘어난다. 물체를 태우는 것이 플로지스톤이라면 어떤 것은 무게가 늘어나고, 어떤 것은 줄어드는 과정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것이 플로지스톤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기체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동료 과학자를 미라로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와 산소호흡이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는 등(에너지 소비는 몸을 태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산소가 필요하다고 라부아지에는 생각했다) 실험을 통해 라부아지에는 '산소'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고, 연구를 빼앗긴 프리스틀리는 날뛰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더 재밌는 이유는 산소 실험을 통해 라부아지에가 추가로 발견한 사실 때문이다. 라부아지에는 산소와 수소에 스파크를 일으켜 이슬이 생기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스파크를 주기 이전과 이후 질량을 비교하여 이것이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발견한다. 여기까지는 과학시간에 익히 들은 이야기인데, 라부아지에의 직업을 생각하면 질량보존의 법칙이 그의 손에서 발견된 사실이 재미있어진다. 라부아지에는 조세징수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데 능했다. 대차대조표는 수입과 지출을 똑같이 맞추는 과정을 수반하는데, 이런 그의 직업 때문에 화학반응이전과 이후의 대상 질량이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과학자들이 이론을 발견한 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재미있었다. 그냥 무작정 암기만 하고 살았었는데 이론이 발견된 과정을 함께 추적하면서, 과학에서도 큰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물론 한마디로 과학사를 알아간다는 거지만) 생각이 들었다. 샤를의 법칙과 보일의 법칙도 동일한 챕터에서 다뤄지는데, 중학교에 처음 들어가자마자 배우는 이론인 만큼.. 그 법칙들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듣는 게 재미있었다. 사실상 이 책 전반은 중학교 과학책 내용의 절반 정도를 커버하고 있다. 그래서 책 자체는 평범한 중학생 눈높이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중학교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과학에 더 매료되었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이래저래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사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새롭게 알게된 내용 중에 너무 흥미로운 것들이 있어서... 왜 벌레가 특정 크기 이상으로 더 커지지 않는지 아는가? 난 어렸을 때부터 지구가 더 더워지면 벌레들이 사람 몸집만해지는 거 아닌지 두려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벌레가 사람만해지는 미스트 같은 영화들은 잘못되었다는 것도!) 이 책은 내 친구에게도 자신있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서평단으로 읽어서 괜히 서평단 도서를 홍보하는 거 아닌가 진실성이 의심될까봐 겁날정도로.. 자꾸 재미있다고 말하는 게 민망하다^^.. 작가의 다른 도서도 읽고 싶어서 Book Depository에서 검색했는데 1도 할인이 없고 오히려 한국 번역서들보다 비싼걸 보면 이 작가는 미국에서도 너무 잘나가는 작가인 것 같다. 세상에. 더 이상 쓸 말은 책에 대한 칭찬밖에 없으므로 이대로 마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즐거운 지적탐구를 선사해준 책에게 감사를 ^^

(출판사로부터 서평단으로 책을 받아 직접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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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악마 새움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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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아침 미사를 마친 교구의 신도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몇몇 사람들은 울타리 근처나 흰 돌담 뒤의 오래된 보리수나무와 단풍나무 아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축일답게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다정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이 도시의 사람들은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아가 유쾌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p.1

러시아의 상징주의 작가 표도르 솔로구프의 대표작품 <찌질한 악마>.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망한 이래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 작품으로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외에는 읽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흔히 러시아 소설이라 하면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에 애를 먹는다. 하지만 이 책의 인물들을 구별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각 인물들의 특성이 자세하게 묘사된 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한다. <찌질한 악마>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었지만, 숨은 메시지를 해석하기엔 어려웠다. 단순히 시대적 상황만을 반영한 작품일까 하는 생각도 품어봤으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작품 내에 의미심장한 구절들이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곱씹어보며 결말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어려웠다. 일단 주인공 페레도노프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했고, 작품 전반적에 깔린 그로테스크함이 그 저변에 깔린 의미를 묻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가치관 자체가 나와 너무 달라 더 이입이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시대상이 빚어낸 편집증적 인물들

그날 역시 흐린 날이었다. 이따금 바람이 휘몰아치며 거리에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마치 햇빛이 들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이 구름 낀 안개 사이로 희미하고 구슬프게 빛나고 있었따. 거리는 애잔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고, 벽 안에 감추어진 가난하고 지루한 삶이 은연중에 드러나 보이는, 아무 희망도 없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누추한 집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따금 눈에 띄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것처럼, 그들을 끌어당기는 고요한 꿈속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오직 아이들만이 신의 기쁨을 지상으로 흘려보내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송수관처럼 생기 있게 뛰어 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무력감이라는 괴물이 그들의 어깨 뒤에 둥지를 틀고 앉아, 어느날 갑자기 생기를 잃을 그들의 얼굴을 위협적인 눈초리로 엿보고 있었다.

p.155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비틀린 성격을 가지고 있다. 페레도노프는 말할 것도 없고, 남을 쉽게 흉보는 바르바라, 그녀의 부탁을 받고 공작부인의 편지를 조작하는 한편 순전히 흥미를 위해 소문을 내는 그루시나, 멍청한 볼로딘, 그리고 우둔한 군중의 전형을 보여주는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음습한 캐릭터들은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 같다. 작품 속에는 페레도노프가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들을 과도하게 신경쓰고, 이로 인해 신경쇠약이 왔다고 추측할 수 는 부분들이 많다.

어디에나 페레도노프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의 몇 사람은 앞으로 그에게 못된 짓을 꾸밀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는 페레도노프가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딘가를 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페레도노프는 누군가가 자기 뒤를 밟고 있고,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다멘코 아가씨를 뒷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사회주의자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그녀 본인도 사회주의자랍니다."

p.334

그때 갑자기 벽에 걸린 미츠키에비치가 페레도노프에게 눈을 찡긋했따.

'밀고를 할 수가 있어.' 페레도노프는 깜짝 놀라 초상화를 얼른 떼어 내고, 그 자리에 푸시킨의 초상화를 가져와 대신 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푸시킨은 궁정과 관련된 인물이니까 염려 없겠지!'

p.346

페레도노프의 살인은 단순히 사회상의 비극 외에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작가가 의도한 일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美를 통한 세계의 구원

책에 실린 작품해석 이야기를 간단히 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많지만) 먼저, '미를 통한 세계의 구원'이 <찌질한 악마>에 반영되어 있다는 이야기. 이것은 사샤와 류드밀라를 통해 상징화된 것 같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책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부분이다.

"그럼, 어린 장미 좋아해?" 류드밀라가 웃음을 참느라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물었다.

"좋아해요." 사샤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류드밀라가 깔깔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바보! 어린 장미를 좋아하다니. 꺾을 수도 없는데." 그녀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불가항력적으로 생겨나는 순수한 흥분은 류드밀라에게 그들 관계의 가장 중요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흥분했지만, 어리석고 타락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p.298

김나지움 남학생인 사샤는 미소년으로, 류드밀라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숙녀이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류드밀라는 종종 사샤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책 후반부에 류드밀라는 사샤를 게이샤로 분장시켜 무도회장에 보낸다. 여기서 사샤는 가장 인기있는 여성으로 뽑히는데, 광기에 휩싸인 군중이 사샤의 옷을 찢으려고 한다. 유일하게 사샤를 도와주는 인물 또한 남자 배우이다. 사샤-류드밀라-남자배우가 비정상적인 작품의 분위기와 대비되며 '미의식을 가진 인물이 집단적 광기에 휩쓸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였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타락하지 않게 돕는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예술작품은 우리 주변의 자연이나 인간사회를 끌고와 변형한 것들이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그 특별한 감정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즉 궁극적인 미의식은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쟁과 현대의 삭막함을 극복하고 인간의 가치를 되찾게 도와준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 나와 다른 세상을 관찰하고 이를 내 세계로 확장하여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가 책의 감상 포인트를 잘 잡지 못했는데도 술술 읽은 걸 보면 책 자체의 매력은 충분한 것 같다. 이 번역본에서는 역자가 슬로구프와의 인터뷰 형식을 빌어 작품을 해제하기도 한다. 슬로구프의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성장기, 러시아의 상징주의 사조, 작품의 분위기 등.... 꼼꼼하게 읽었지만 내가 러시아 상징주의와 근현대사에 조예가 없어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또 이 작품에 예수와 관련한 기독교적 상징이 많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해설을 읽어도 내가 종교적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중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배경지식이 깊지 않아 디테일한 부분을 놓친 것 같아 아쉬웠던 책이다. 러시아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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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다리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8
천선란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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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한국 SF 소설 시리즈물을 발간하고 있는 그래비티북스. 대학교를 졸업하면 그래비티 북스에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전부 사서 읽어봐야지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고 취업하고 자리를 잡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오래된 서평 정리들을 하면서 그래비티 북스 출판사의 책들을 찾아보았는데, 약 2년 동안 새로운 SF 신간들이 여러권 나왔더라. 소개를 보니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두 권 남짓 있었다. 이제 여유가 생기면 GK 시리즈도 읽어보려고 했는데 참 할 일이 많구나 ㅎㅎ..(GK 시리즈는 외계행성:EXO PLANET 이후로 한 권 밖에 안 나왔더라. 고등학교 과학 수준이 아니라 전공자 정도부터 알 수 있는 지식을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정말 좋았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깊이가 깊은 교양서를 내다보니 수요자가 많지 않나보다. 외계행성 정말 좋았는데.. 이럴 땐 내가 좀 더 부지런해서 블로그 방문자가 더 많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홍보가 되지 않았을까 ㅠㅠ..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수요가 많아져야 비슷한 책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특색있는 출판사이다 보니 관심이 많아서 잡담이 길어졌다.




<무너진 다리>는 인류 식민지로 테라포밍할 외계행성 '가이아'로 가던 우주인 '아인'이 임무에 실패하면서 벌어진 전지구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인은 그의 기억과 정신만 남은 채 기계의 몸에 옮겨진다. 그가 임무에 실패하면서 지구는 황폐화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간 형태의 안드로이드 '휴론' 800대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 오염된 대륙을 청소하게 한다. 그러나 이 기기 800대는 본부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인간들은 이 안드로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진다. 모든 일의 계기는 아인의 임무 실패로 벌어진 일. 아인은 '휴론'의 몸을 한 채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파견되어 사라진 기기 800대의 전말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안드로이드는 워낙 소프트 SF 단골소재이긴 하다. 이전에 그래비티북스에서 냈던 <꿈을 꾸듯 추듯>에서도 안드로이드의 존엄성에 대해 다뤘었다. 하지만 <무너진 다리>는 '인류의 멸망'과 '계급문제'로 소재를 다양화하고 비교적 사건을 촘촘하게 구성했다. 특히 주인공 '아인'의 동생 '아라'와 관련된 과거사, 트라우마를 풀어 나가면서 독자가 끝까지 궁금증을 가지고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소재가 흔하기 때문에 지루하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작가의 가치관을 담아서 다른 안드로이드 소설과 차별점을 보여줬다. 아쉬웠던 점은 많은 등장인물이 교차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와중에, 그들간의 이야기를 엮어주는 것이 '동시간대'라는 공통점 밖에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사건 구성이 촘촘한데 주인공 외 인물의 매력이나 캐릭터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가 인간과 휴론의 동맹을 통해 계급문제를 다뤘다는 점이다. 작품 내에서 인간들은 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의 경쟁자로 인식한다. 800기의 휴론이 사라졌을 때도 그들은 인간의 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휴론이 인간을 위협하지도, 모든 인간이 휴론을 착취한 것도 아니었다. 자본가를 비롯한 소수의 지배계급이 로봇을 만듦으로써 인간의 착취를 더 쉽게 만들었다. 로봇에 의해 삶의 경계로 밀려나게 된 인간들은 로봇을 미워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같은 피착취계급인 로봇(휴론)과 협력함으로써 불합리한 체제를 전복시킨다. 이런 이야기는 요즘처럼 혐오와 갈라먹기가 판치는 시대에 시기적절한 통찰을 제공한다. 나는 젊은 세대로 가면 갈수록.. 먹고 산다는 기본적인 문제 때문에 눈 앞의 파이를 놓고 같은 계급끼리 싸운다고 생각한다. 누가 더 힘든지 편을 나눠 싸우느라 구조적인 불합리함을 외면한다. 오히려 그 불합리를 '공정한 경쟁을 위한 제약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등수매기기에 세뇌되어온 결과 시험점수만이 완전한 공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세대의 문제점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아마 더 많은 시간과 새로운 지면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세상에 '공정한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로봇과 인간이 힘을 합쳐 새 행성에 희망을 쏘아올린 결말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삶의 문제를 해결할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대립하기보다는 화합하고, 작은 문제보다는 보다 크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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