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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다산책방 펴냄.

 

 

0. 유럽권 추리소설

 

노르웨이의 전 법무부 장관이자 추리소설가인 안네 홀트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나라를 알고 싶으면, 그 나라의 범죄소설을 읽으세요.”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의 저자 피에르 르메트르는 그저 한 작가일 뿐이지만, [알렉스] [그 남자…]를 연이어 읽다 보니 현대 유럽권 추리소설의 흐름이 보이는 듯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북유럽권 베스트셀러 출신인 헤닝 만켈의 발란더시리즈부터,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 헤르만 코흐의 [디너]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이는 공통점이었다. 바로 법, 정의, 도덕에 대한 회의다.


 

1. 누가 죽였지?

 

이 책은 소피프란츠의 부분으로 나뉜다. 이야기는 소피가 눈물에 젖고 목이 멘 채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실성한 이후부터 그녀는 매일 울면서 깨어난다. 소피는 교육받은 사람 특유의 교양 있고 엄숙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물건을 자주 깜박하거나 갑자기 멍한 상태에 빠지는 등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다. 그녀에겐 주변인의 죽음과 관련된 과거의 사연이 있고, 현재는 제르베 부부라는 부유한 집안에서 보모를 맡고 있다. 일 때문에 귀가시간이 들쭉날쭉한 부부를 위해 여섯 살 난 남자아이 레오를 돌보는 일이다. 그녀가 누렸을 과거만큼 행복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안정된 생활이었다. 추락은 레오가 시체로 발견된 날 아침부터다.

 

그 어린아이는 잠옷으로 온 몸이 묶이고 신발끈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집에는 그녀 혼자 뿐이다. 아이를 죽인 끈은 소피의 신발끈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미쳤다는 걸 알고 있다. 아니,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다.

 

현장에서 정신 없이 도망치는 장면을 보면 소피는 진짜 정신병자로 보인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사실은 간단한 이야기야. 네가 애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애를 죽인 거야. , 레오…… / 하지만 잠깐! 도망쳐 나올 때 발견한 거지만, 아파트 문이 안에서 이중으로 잠겨 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하지? 아냐,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자.”

 

이후의 도망생활에도 시체는 그치지 않는다. 법이 명하고 경찰이 붙인 그녀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소피 뒤게, 최소 3명을 죽인 연쇄살인범.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아니다. 진상은 프란츠의 이야기까지 읽어야 알 수 있다.


 

2. 법을 무시한 복수는 정의로운가?

 

고전적인 추리소설에서는 대개 정의의 편인 탐정이 승리한다. 범죄자는 살인 등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자수하는 대신 도피를 꾀하는 악인이다. 탐정(혹은 경찰)은 법을 등에 없고 범죄자를 심판한다. 가끔 [오리엔트 특급살인] 같이 정의가 법을 앞서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탐정은 법의 수호자이고, 그렇기에 그는 옳다. 탐정이 법의 편에서 벗어나는 때는 그 탐정이 물러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만약 가공할 만한 악인이 있는데, 법이 그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기지만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는 말이 있지만, 법의 그물은 그냥 크고 성길 뿐이다. 법이 악인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똑똑한 사립 탐정이 나서는 것도 방법이다. 많은 추리소설이 사립 탐정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남자…]에는 경찰도 탐정도 등장하지 않는다. 법을 등에 업지 못한  [그 남자…]의 희생자인 소피는 법에 의지하는 대신 스스로 복수하기를 택한다. 범죄자를 법의 처분에 넘기는 대신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이는 미국식 액션 영화 히어로들이 보여주는 사적 수호와도 닮은 면이 있다. 법이 미덥지 못할 경우 개인이 총을 집어들고 스스로를 지킨다는 점에서다. 다른 점은, 주인공의 행동이 정의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희생자는 언제나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지만, 힘을 행사하는 희생자는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다. 또 다른 희생자를 낳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는 그런 고민을 제외한 채 재미를 추구한다. 현대 유럽권 추리소설들은 도덕적 딜레마를 남겨놓았다. 저자 피에르 르메트르가 소설에 깊이를 더하는 방법이다.

 


 

3. 정신병

 

국내에 먼저 소개된 작품 [알렉스]에서도 보였지만, 이 작가가 이야기를 이리저리 전환하며 사람 혼을 빼는 솜씨는 정말 뛰어나다. 플롯을 잘 짠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알렉스]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초기작 티가 나긴 하지만, 똑같이 정신 없이 읽었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행복한 여자 한 사람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집요함. 유일하게 페이지가 안 넘어가는 부분이었다. 특별히 잔인한 묘사도 없건만, 집요한 악의가 너무 끔찍해서 읽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소설로서는 생생해서 좋긴 하지만, 참 가차 없는 사람이다.

 

법에 따르면, 가해자가 심신미약 상태라면 정상참작이 인정된다. 정신과 진단서를 떼오면 크게 처벌받지 않는다는 거다. 이 소설의 범인은 분명 처벌대상 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신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피해를 끼치지만 법적으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 그래서 여기의 피해자는 법과 정의의 실현 대신 개인의 이득을 택한다. 법으로, 공개적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매우 귀찮고 어렵다. 옳은 선택일까? 이 소설이 은연중에 지적하고 있는 딜레마다.

 

심신미약에 대한 정상참작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피해자가 사적으로 복수를 해 법의 빈틈을 메우는 게 옳다는 뜻도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고, 불확실하다. 다만 기존 추리소설의 탐정==정의=옳다는 공식이 무너졌다는 건 확실하다. 앞서 언급한 안네 홀트의 말을 따르면 그만큼 도덕적 딜레마가 전면에 부각된 사회라는 뜻이 될 수도, 유럽권 추리소설(과 그 독자들)이 그만큼 깊이 있게 발전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추리소설의 트릭으로 활용하기엔 정신병은 부실한 선택지다. ‘중국인의 신기한 기술이나 숨겨진 쌍둥이처럼 손쉽고 허무한 해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알렉스]에 비해 [그 남자…]의 구조적 완성도가 부족해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전 추리소설처럼 작가와 독자가 정직한 머리싸움을 벌이는 류의 소설이 아니므로, 그보다는 법-정의-도덕에 따르는 딜레마를 거듭해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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