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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굿바이 동물원]

태식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돌이켜 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인생이었다. 괜히 돌이켜봤다는 후회마저 든다. 더 살아봤자 나아질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 길었던 인생극장도 어느덧 막바지다. 다음은 그 인생극장의 마지막 회. 오늘 분량이다. 조명이 꺼진다. 필름이 돌아간다.

 

[굿바이 동물원]은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자기 인생을 두고 돌이켜봐도 부끄러울 정도로 보잘것없고, 더 살아봤자 나아지지도 않으리라고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하는 이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김영수 씨다. 그는 몇 달 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온갖 부업을 전전한다. 마늘 까기, 인형 눈 붙이기 등 값싸고 고전적인 일거리다. 집은 반지하로 옮겼고 아내는 마트 계산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잡은 일이 동물원이다. 영수 씨는 동물원이라기에 다른 부업에 비해 훨씬 그럴싸한 직장을 잡았다고 기뻐하지만, 알고 보니 사육사가 아니라 동물원의 동물이 되는 일이다.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바닥을 달리는 일거리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도 달리 없다. 밖에서 인간답게 살기란 너무 힘들다. 차라리 동물이 되는 게 더 사람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원래 사람을 동물이라고, 사람 사는 데를 동물원이라고 부르는 건 모욕적인 표현이다. 동물이란 사람에 비해 제 구실도 못하고 생각도 없고 당장의 필요에 충실한 존재다. 사람은 그 반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 취급을 받을 때 이야기다. 김영수 씨도 참 먹고 살자고 별 짓을 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삶 역시 사람도 아니다.


예를 들면 김영수 씨의 동물 동료 하나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다. 대학도 이미 졸업했다. 고시원에 혼자 살면서 144:1을 뚫을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한창 나이인데도 맨날 무릎 나온 추리닝이나 입고 다닌다. 이 상태에서 나오는 말이 딱 그거다. 이게 사는 건가.

 

반면 동물 팔자는 상팔자다. 동물이라서 일하다 다쳐도 산재보험이 안 되긴 하지만, 대신 사회생활 따위 안 해도 된다. 집값도 밥값도 전기세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관람객)이 있고, 충실히 일하면 그에 따라 보상이 나온다. 동료들도 훨씬 인간미가 있다. 사람이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따르는 혜택이다.

 

따라서 김영수 씨를 비롯한 동물들이 처한 상황은, 그 자체로 희극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랍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된다. 한 동물 선배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랍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작품의 분위기는 꽤나 발랄하다. 인형 눈 붙이다가 본드에 취해서 슈퍼맨이랑 싸우는 것도 웃기고, 동물(로 취직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고 놀라 뒤집어지는 것도 웃긴다. 김영수 씨와 같은 팍팍한 처지만 아니라면야 피식피식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 분명 칙칙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휙휙 읽힌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나 역시 찔끔 피식 웃으며 읽었지만, 한편으로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 구실 못하는 잉여들이 줄곧 유쾌한 이유에 대한 구절이다.

 

이렇게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여로 칭한다. 오늘날 자신을 잉여로 분류하는 사람은 많다. 번듯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른다. 이것은 포기, 항복,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누구도 시키지 않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을 행하기 시작한다. () 잉여들은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데, 이 유쾌함은 사실 절망의 반작용이다. (53p)

 

앞날이 막막한 20, 김영수 씨처럼 중간에 미끄러진 30대에는 유독 사람 아닌 잉여가 많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스스로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두고 쓸모 없다는 생각에 젖는 이유는, 바깥에 이미 쓸모 있는 인생의 자격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이미 이상적인 삶, 성공한 삶이라는 모범 답안이 정해져 있다. 4년제 대학 졸업, 취업, 결혼, 아파트 마련, 사회적 지위 등, 허들을 넘으며 자기를 증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쓸모 없는 삶이다.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을 붙이면서 사람다운 자존감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냥 웃을 수밖에.

 

웃음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뒤에 쓴 맛이 남는 종류의 웃음이다. 울 수 없어서 대신 웃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수 씨가 정리해고 당하던 날, 다시 말하면 동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날, 그는 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데 빈 칸이 없었다. () 그런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물체가 눌리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과육이 뭉개지고 과즙이 흘러나오는, 딱 그런 느낌의 소리였다. 소리는 작고 여리고 은밀하고 숨겨지길 원하고 있었다. 두 칸 다 그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고 싶은 사람들이 사용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울 수 없어서 소주를 마시며 웃는 사람들. 한두 사람 힘든 게 아니니 마땅히 울 자리도 없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입맛이 꽤 쓰다.

 

한겨레문학상 16회 수상작이었던 장강명의 [표백]도 젊은 사람들의 무기력한 체념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안다. 김영하의 [퀴즈쇼]도 답 없고 돈 없는 늦깎이 청춘의 이야기였다. 이런 모습이 딱 지금 사회의 사람들이 겪는 삶의 형태이기 때문에 계속 소설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굿바이 동물원]의 끝은 희망차다. 아쉽게도 문제의 답이 되는 희망은 아니고 그래서 무책임한 회피라는 느낌도 들지만, 하나의 소소한 소설로는 뭐 나쁘지 않다. 그리고 분명 희망적인 결말에서 위안을 받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은 보다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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