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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바로 써먹는 논리학 사용법
코디정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10월
평점 :
2025. 8. 6. 작성 글.
#협찬 흐름...
오늘은..
의식의 흐름으로 갑니다.
(이젠 놔줄 때가 되었다며.... 🥲)
평소에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계신가요?
저는 평소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사는데요..
일단 지금은, 쓰고 있는..
이 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읽힐 만한 글을 써야 할텐데..."
라며.. 걱정이 한 편으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
"뭐 별 수 있나? 그냥 능력껏 써야지.."
라며 뒷 내용을 그럭저럭 완성할테죠....
이런 생각과 동시에 다른 생각들도..
머릿속에 함께 흐릅니다.
예를 들자면..
곧 그믐에서 시작되는
독서 모임에 대한 생각도 흐르고..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는데..)
그 외에도 여러 생각들이 불현듯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합니다.
이런 것들은 제가 한..
생각에 관한 생각입니다.
실체가 있는 듯 표현했지만..
사실 이 생각들에 실체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생각 나는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잘 알아 듣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제 생각에는 흔히...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그것'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비슷한 경험일겁니다.
우리는 큰 범주에서는 꽤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긴 성장기를 거쳐 성인이 되면..
어떻게 살아갈지를 각자의 방식으로
결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
그러던 중, 혹은 그 이후..
누군가는 생각의 전환이
절실해지는 사건을 겪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죽다 살아나는 경험이라던지...
그리고 나서..
크게 가치관을 바꾸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이런 식으로..
변곡점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그냥 바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보통은 어떤 계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강렬한 경험이 없이..
진로를 쉽게 바꿀 수 없는 무척이나
보수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
---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약간은.. 알 것도 같아요.
생각의 기술을.. 배웠거든요. 😉
비록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이긴 하지만..
그 기술을 지금 공유드립니다.
이쯤 줄일게요.
끝!!
#생각의기술
#코디정 지음
#이소노미아
#논리학 #우주서평단
의식의 흐름에...
파도가.. 🌊🌊🌊
#아무말대잔치
#북스타그램 #바닿늘
비슷한 주제의 글은..
#바닿늘철학
@woojoos_story 모집,
#이소노미아 도서 지원으로
#우주클럽_철학방 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아래에서부터는 해당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최소한으로) 수정 되었습니다.
경험이 머릿속에서 하는 역할
경험은 인간 머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지식은 경험이 아니면 얻을 수 없고, 경험이 아니면 지식을 검증할 수 없다. 경험할 때마다 데이터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업데이트된다. 이런 경험의 역할을 논리 관점으로 이해해 보자.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 머리 안에 개념이 생긴다. 따라서 경험이 없다면 어휘력도 없다. 직접 경험하든, 간접 경험하든,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어휘가 쌓인다. 이처럼 어휘력은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이란 머릿속에 언어를 쌓는 행위. 인간 머리 안에 사전을 만들고 그 사전의 성능을 개선하는 행위다. 경험은 개념만 수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이란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활동이었다. 두 개 이상의 단어를 연결하는 행위. 다시 말하면 어휘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행위였다. 그것이 '판단'이다. 즉 경험은 판단력을 섬세하게 만든다. 판단력이 섬세해질수록 어휘력도 좋아진다. 왜냐하면, 생각을 거듭할수록, 단어가 갖는 의미 크기를 더 잘 알게 되고, 의미의 선명함이 개선되고, 단어들의 소속 체계가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단어들이 많아지고 판단들이 쌓임으로써 우리들 머릿속 '대전제'가 풍요로워진다. 그러므로 인간 머리 안에서 우세력을 발휘하는 대전제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서 추리력이 더 빠르고 정확해지며, 대체로 건전해진다. 경험의 최종 목적지는 추리력을 강화해서 생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의 역할이 좋은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험이 다 이로운 것도 아니고, 좌절, 실패, 실수, 손해, 악행, 부정, 폭행, 거짓, 우발적인 사고 등 이롭지 않은 다양한 경험도 있다. 그러나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이로운 경험이든 해로운 경험이든, 경험은 인간 머릿속의 어휘력, 판단력, 추리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경험이 데이터 공급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에서 제시한 첫 번째 질문에 답해 보자. <경험은 부족하지만 논리적인 사람이야>라는 판단이 타당한 표현 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경험이 부족하고 일천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휘력, 판단력, 추리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휘력, 판단력, 추리력이 논리력의 3요소이다. 그러므로 경험이 일천한 사람은 논리력이 낮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논리적일 리 없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논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연히 가끔 그렇게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논리력이 낮을 것이다. 다만 배우려는 자세(학습력)가 좋아서, 더 빠르게 논리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있겠다. 그러나 경험을 쌓기보다는 자기 머리를 신뢰해서 쉽게 판단하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뇌피셜'에 맡기기 십상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대전제를 신뢰하기 어렵다. 제대로 시련을 겪지 않고 도전을 당하지 않은 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대전제가 얼마나 고집스러울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 그 혹은 그녀가 지능이 좋다면, 더욱 걱정스럽다. 지금껏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부지기수로 만났다.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나
사람의 천성이 본래 선한지, 본래 악한지는 모르겠다. 성선설과 성악설로 표현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으나, 선한 기관과 악한 기관, 혹은 선한 유전자와 악한 유전자를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선악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기준에 따르든 마찬가지다.
선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더 선하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선함에 관한 개념과 원리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량한 대전제가 더 많이 더 강하게 활약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선량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선한 경험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보면, 실제로 선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 따라서 선한 행동을 하자. 어려운 상황에 처한 타인을 돕고, 기부하고, 타인을 용서해 주자. 거짓을 멀리하되 약속을 지키며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삼가자. 그러나 버젓이 악한 행동을 일삼으면 그 사람은 악할 것이다. 머릿속 경험 데이터베이스에 악한 개념이나 원리가 많을 것이고, 우세한 머릿속 대전제가 틀림없이 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대전제가 활동하도록 그대로 놔두면서 경험이 그런 대전제를 계속 보충하고 강화한다면, 누구든지 사이코 패스, 소시오패스가 된다.
그러므로 착한 행동, 선량한 행동을 하는 경험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런 선한 행위의 권고는 단순히 도덕적인 동기나 결과의 중요성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들 머릿속에서 우세력을 발휘하는 대전제의 건강함을 위해서라도 인생을 살면서 가급적 선량한 행동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
그런 것 없다. 사람은 변한다. 육체적인 변화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변화한다. 스타일이나 관심사만이 아닌, 성격도, 가치관도, 인성도 변한다. 다만, 변화의 기울기가 너무 작아서, 변하긴 하는데, 본인이든 타인이든 그 변화를 실감하는 것보다, 이번 생을 마감하는 시점이 더 빨리 오기 때문에, 그 변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관심사는 변화의 기울기를 향한다.
어째서 변화의 기울기가 작은가?
어째서 변화를 실감하기 어려운 것인가?
왜냐하면, 인생을 살면서, 변화의 기울기가 작은 경험만을 했기 때문이다. 머릿속 대전제, 생각의 토대는, 대체로 게으르고, 변하기보다는 견고하게 굳어서 신념이 되기를 바란다. 이렇듯 대전제는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웬만한 충격이 아니고서는 대전제는 잘 변하지 않는다. 머릿속 대전제가 그대로라면, 자잘한 경험으로 어떻게 사람이 크게 바뀌겠는가? 자잘한 경험들은 머릿속의 기존 대전제에 흡수, 강화, 복종, 혹은 튕겨져 나갈 뿐이다. 평범한 경험의 충격량은 자기 머릿속 대전제를 흔들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의 전환, 정신적 거듭남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어려운 현상이다.
대체로 경험은 그 개수가 많든 적든, 많이 경험하든 적게 경험하든 기존 대전제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험은 편견을 강화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는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의미다. 이 말은 비슷한 대전제를 갖고 있는 사람끼리 교류한다는 뜻으로 비쳐진다. 만약 서로 공통 대전제를 갖고 있다면, 다른 직업, 다른 소속을 갖고 있어서 경험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경험의 충격량은 그들의 공통 대전제를 흔들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기존 대전제를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변하지 않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렇지만 '어떤 경험'은 사람을 크게 바꾼다. 사람의 머리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리거나,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기존 대전제의 질서를 크게 흔들기도 하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들은 대체로 낯선 체험의 충격을 동반한다. 낯선 경험이 기존 대전제의 질서에 미치는 충격량은 방금 언급했던 평범한 경험의 충격량이 비할 데 없이 크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 인생의 깨달음, 사서 하는 고생, 충격적인 책, 이상한 사람과의 진지한 교제, 믿은 수 없는 패배(실패, 배신, 좌절), 그 외 인생의 전환점을 일으키는 경험이 그런 낯선 체험의 충격을 동반한다. 평범한 경험보다 그 수효가 적을 뿐이지, 살다 보면 만나는 그런 충격적인 경험이다.(…)
경험의 한계
경험이란 인간 바깥의 여러 데이터를 머릿속으로 가져와서 처리하는 활동이며, 인간은 경험을 통해 머리 안에서 정보를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가 변환된다. 머리 바깥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은, 그리고 세계 그 자체는, 경험을 통해 머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간 머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리하는 형식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아날로그가 0, 1의 기호로 디지털 변환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경험이 인간 머리 바깥의 세계에 대하여 100% 확실한 진리나 지식을 주지는 못한다(변환됐기 때문에). 게다가 사람마다, 상황마다, 시대마다, 장소마다, 조건마다 경험이 인간 머릿속으로 선물해 주는 데이터가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을 ㅡ 심지어 자기가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ㅡ 완전무결함의 확신으로 주장하곤 한다. 이따금 과학자들이 자신의 지적인 흥분을 참지 못하고 그런 식의 과장을 하기도 한다. 경험이 완전무결한 확신으로 오용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종교다. 지식은 생각보다 겸손하다. 왜냐하면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경험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치 무슨 대단한 진리를 아는 것처럼 잘난 척할 수는 있어도, 경험이 진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한계는 굳건하다. 세상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진리와 우리 머리 사이에 놓인 장벽을 우리가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그런 능력을 우리 머리가 갖고 있지 않다.(…)
자기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믿더라도, 실제로 지능지수가 높다고 할지라도, 만약 머릿속으로 가져오는 데이터의 양이 적다면, 그 빈약한 머릿속 경험 데이터베이스를 갖고서는 인생을 살기에 적당한, 타인과 소통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살기에 충분한 지식을 갖지는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자. 어휘력, 판단력, 추리력이 빈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