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상처를 주고 아이는 받는다. 가장 많이 사랑해 줘야 할 부모는 가장 많이 상처를 준다. 껴안는 두 손으로 때리고 사랑을 말하는 입술로 저주를 퍼붓는다. 바르게 자라도록 도와야 할 선생은 성장하는 아이의 마음과 가능성을 구부리고 누른다. 상처 입어 휘어지고 구부러진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피로한 몸을 끌며 땅만 보며 집과 학교를 오간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패이고 숨 쉴 때마다 따가운 날들.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 없다. 없어. 나는 내게 말하리라. 내 말은 내가 들어줄 거야.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내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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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가 이렇게 물어보면 할머니는 행복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사람의 도리가 중요한 거라고 대꾸한다. 이런 대화가 시작되면 나는 이모도 할머니도 미워서 집을 나간다. 계속 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머리가 터질 것 같으면 나뭇가지나 돌멩이를 주워 거기에 생각을 가둬 버린다. 그리고 외갓집 앞에 버린다. 점점 쌓여가는 나의 생각 무덤.
검푸른 빛에 줄무늬가 있고 내 주먹보다 작은 돌멩이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뒀다.
‘할머니 말은 틀렸다. 행복은 중요하다. 모두가 바라는 소중한 것이다.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 나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길쭉해서 무기처럼 손에 쥐기 좋은 돌멩이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뒀다.
‘행복과 상관없는 사람의 도리는 이상하다.’
굵고 짧고 거칠한 나뭇가지에는 이런 생각을 가뒀다.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정말 어렵다. 불행하다고 말하기는 정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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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불 위에 올려 둔 냄비에 된장을 한 숟가락 풀면서 할머니는 중얼거렸다. 나를 달래려는 말도 아니었고 가르치려는 말도 아니었다. 기도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 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그때 나는 싱크대에 기대앉아 마늘을 까면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어떤 말들은 내 몸에 체취처럼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일부로 남아 버렸다.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라면 나는 지금 병이 든 상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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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맑다.
엄마는 ‘맑다’는 단어를 귀중하게 간직했지. 나는 ‘지금’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지금은 금방 사라지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건 할머니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 사라지는 지금 속에 아직 있다는 것.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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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즐거울 때는 같이 웃었지만 슬플 때는 서로 모른 척했다. 위로를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가끔 상처를 받기도 했다. 엄마도 나에게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들키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실컷 울 수 있도록 가게 밖으로 나왔다. 어렸을 때 나는 눈물샘이 자주 막혔다. 슬픈 일이 생기면 그때의 내 사진을 보았다. 눈이 붓고 눈곱이 낀 아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기. 다시 눈물샘이 막힌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흐르지 않는 아기. 나는 계단에 앉아서 눈을 맞았다. 내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눈을. 눈이 펑펑 내렸다. 쌓인 눈을 보자 내가 죽은 게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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