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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노트 - 가장 순수한 음악 ㅣ 거장이 만난 거장 1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10월
평점 :
앙드레 지드의 『쇼팽 노트』는 ‘이 책을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 신부님의 영전에 바친다.’로 시작한다. 음악 애호가이나, 연로한 탓에 피아노 앞에 앉은 지 오래인 신부님은 소리 없이 악보를 읽으며 음악을 상상한다고 한다. 독일인인 그가 지드에게 털어놓은 비밀은, 그가 읽는 악보가 바흐도 모차르트도 아닌 ‘쇼팽’의 악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음악 중에 가장 순수한 음악이죠.’ 지드는 매우 공감하며 이렇게 글을 잇고 있다.
“가장 순수한 음악.” 바로 이것이다. 내가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한 표현, 그토록 연세 높고 중요한 인물인 종교계 원로가 지닌 일체의 권위로부터 보호하려고 내가 마음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운 표현, 그러나 콘서트에서 연주자들이 우리에게 연주해 보이는 그 현란하고 세속적인 것이 쇼팽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이다. (9)
맞다. 내가 생각하던 쇼팽의 음악에 대한 감상이 바로 그것이다. ‘현란하고 세속적인 음악.’ 나는 클래식 애호가도 아닐뿐더러 쇼팽에 대해서도 유약하고 섬세한 기질의 작곡가, 상드의 남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부터 쇼팽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17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쇼팽을 이렇게도 칠 수 있는 거였나? 결국 유투브 채널을 통해 몇 번이고 그의 연주를 보고 들었고, 실황 앨범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관련 책을 여럿 보기 시작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쇼팽 노트』는 그 중에서도 특히 어렵게 느껴진 책이다. 앙드레 지드라는 이름의 무거움이 첫째, 쇼팽의 음악에 대한 그의 숭고한 사랑이 둘째, 그리고 쇼팽의 음악 세계를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이 그 어려움들이었다.
1장인「쇼팽 노트」의 시작부터... 나는 쇼팽의 전주곡(프렐류드)을 감상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D단조 전주곡, A단조 전주곡이라고 하면 모른다. 하지만 번호를 붙여 전주곡 24번, 전주곡 2번이라 하면 금세 알기에 책은 포스트잇으로 가득해졌다. 이렇게 얇은 책에다 이리도 많은 인덱스라니. 아무튼 지드는 「쇼팽 노트」에서 그가 생각하는 쇼팽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지드의 생각에, 쇼팽을 리스트처럼 연주해서는 안 된다. 기교로는 결코 쇼팽을 연주할 수 없다. 그러한 연주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가장 좋은 연주는 ‘산책’과도 같은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연주자의 손가락 아래서 빚어지는 악구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처럼 보이고, 연주자 자신조차 깜짝 놀라게 되고, 듣는 이를 연주자의 황홀경 속으로 들어오라며 은근히 불러주는 것이 나는 좋다. (16)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하는 쇼팽의 음악은 ‘당신을 문득 멈추게 하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것이지 능수능란한 기교적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쇼팽은 감상적이다. 하지만 지드가 그를 좋아하고 칭송하는 것은 그러한 슬픔(단조)을 통해 기쁨(장조)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음표에 인간적인 감정을 담아, 음 하나하나에 표현적인 힘을 싣는 것이 바로 쇼팽의 표현력이다. 여기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전주곡’이다. 종래의 전주곡이 푸가와 짝을 이루었던 것(그래서 이름이 전주곡)과 달리 쇼팽의 전주곡은 그 자체로 손색없는 ‘연주회용 전주곡’이다. 이 전주곡들은 쇼팽의 천재성이 드러난 작품이라 평가된다.
지드는 쇼팽의 음악을 기교만으로 연주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불만을 털어놓는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쇼팽을 연주할 때 테크닉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악구가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이 쇼팽의 특별한 기법이라는데 말이 쉽지... 오른손의 루바토를 위해 왼손의 박자가 정확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결코 반주처럼 느껴져서는 안 된다. 지드가 지적하는 것처럼 기교로서만 연주해서도 안 되고, 감상적으로만 연주해서도 안 된다. 결국 (다른 음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쇼팽의 음악도 테크닉과 해석의 섬세한 조화가 요구되는데 이는 간과되기 쉽고, 따라서 쇼팽의 음악은 연주하기 까다롭다는 것이다.
「쇼팽 노트」는 쇼팽에 대한 지드의 해석과 연주 가이드라 할 수 있다. 지드 자신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으며(1927년 2월 28일 일기에 따르면 매일 세 시간씩 연습한다고!), 악보를 보고 연구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을 들인다. (그가 피아니스트 아니크 모리스를 교습하는 장면이 담긴 영화 내용도 실려 있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드가 해설하는 작품의 악보, 마디가 함께 실려 있지만 해당 작품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2장인 「앙드레 지드의 일기」와 3장 「쇼팽 노트에 관한 단문들」은 1장을 보충하는 텍스트들이다. 4장에서 미카엘 레비나스는 지드의 「쇼팽 노트」에 덧붙여, 쇼팽의 음악을 해설하고 있다.
지드는 쇼팽의 작품이 폴란드적인 감성을 담아낸 것을 인정하면서도, 프랑스 방식도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마도 '해설'에 따르면, 프랑스 피아니즘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쇼팽은 자신을 폴란드인이라 생각했지만, 주 무대는 프랑스였기에 그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연주했던 플레옐이 프랑스 브랜드이기도 하고... 거의 평생을 음악과 함께하며, 쇼팽을 듣고 연주하고 사랑해온 지드가 쓴 「쇼팽 노트」를 단번에 이해하겠다는 것은 내 욕심이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의 리뷰는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여러 연주자들의 해석을 듣고, 악보를 보며 조금은 피아노를 쳐 보기도 하고, 쇼팽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이다. 아, 나도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글, 애정을 쏟아 부은 이런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