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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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고전'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19세기 영국 남부 지방의 중산층(젠트리) 사회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현대 영국에 역사적 연속성을 부여하며, 오스틴의 소설에는 이 시기 젠더와 관습이 녹아들어 있다. ‘결혼’은 젠트리 계급의 주된 관심사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진다. 당시 결혼은 경제적인 거래였는데, 젠트리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할 수도, 혼자 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속분이 없다면, 삶을 꾸려나갈 수입과 안정은 '결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오만과 편견』에서 사랑이 없는 결혼을 택했던 샬럿의 입장은 이를 잘 설명한다.


장남이 아닌 남성 역시 군인이 되거나, 결혼을 통해 재산을 모아야 했다. 『설득』의 웬트워스나,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피츠윌리엄 대령이 그러하다. 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탓에, 대체적으로 결혼하는 남성의 나이는 여성보다 많았고 오스틴의 소설에서도 유일하게 연하와 결혼한 것은 『오만과 편견』의 샬럿 뿐이다. 이 경우는 둘 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노생거 사원』의 헨리 틸리는 "남성은 청혼할 여성을 고르지만, 여성에겐 거절할 힘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의 리지가 콜린스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두 사람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흔치 않은 일이었으리라. 오스틴도 청혼을 거절한 경험이 있다. 자신과 가족의 힘을 덜어 줄 '경제적 약속'을 거절한 제인은 『설득』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설득』에 등장하는 앤 엘리엇은 27세로, 오스틴 소설 여주인공 중에 나이가 제일 많다. 『오만과 편견』의 베넷 부인이 15세를 사교계 진출 최적 나이로 주장함을 볼 때, 27세는 늦은 나이로 보이나, 앤은 귀족이며 1만 파운드의 상속녀로, 독신은 '선택'에 따른 결과로 짐작된다. 그녀는 문학적 소양을 갖춘, 현명하고 사려 깊은 인물이다. 엘리엇 가는 재정 상태를 고려하여, 켈린치 저택을 세놓기로 한다. 세입자는 앤의 전 약혼자, 웬트워스 대령의 누나와 남편 크로프트 제독이다. 『설득』의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의 막바지, 전쟁을 위해 떠났던 젊은이들이 귀향하는 사회 변동기이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젊은이를 향한 모국의 시선은 따뜻했지만 기득권이던 귀족은 탐탁지 않다. 엘리엇 경이 제독의 볕에 탄 피부를 비웃는 장면은 그런 인식을 반영한다. 전쟁은 상속자가 아닌 남성들이 재산을 모을 좋은 시기였고, 돌아온 그들은 짝을 찾아 정착하려 한다. 웬트워스 대령 또한 전장에서 공을 세워 이만 오천 파운드의 재산을 모은다.


소설 전반부, 집안 살림을 꾸리며 모두에게 친절한 앤의 미덕은 이용가치로 여겨지며, 그녀 역시 거기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듯하다. 여전히 멋진 옛사랑을 맞이하는 앤은 스스로가 초라하기만 하다. 그와의 접점을 줄여보려 애쓰지만, 오히려 웬트워스는 신붓감을 찾으러 왔다며 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어린 루이자와 어울린다. 팔 년 전, 열아홉의 앤은 스물셋의 웬트워스와 사랑에 빠졌다. 웬트워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레이디 러셀은 그가 탐탁지 않았고, 앤은 파혼하라는 설득에 따랐다. 웬트워스는 입대하여 재산을 모은 뒤에도 앤을 용서하지 못해 돌아오지 않는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대령은, 과거 앤이 찰스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얘기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설득당하는 사람이 싫습니다." 그리고 루이자의 고집, 뚝심을 높이 평가한다.


라임 여행에서 마주친 사촌, 엘리엇 씨는 앤에게 관심을 표한다. 웬트워스는 루이자의 사고로 인해 암묵적인 약혼 상태에 놓인다. 그는 앤을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고, 자신의 경솔함 탓에 그녀가 다른 신사의 구애에 응답할까 초조해 한다. 또 자신과 달리, 앤과 어울리는 지위와 재산을 갖추어 가족들에게 환영받는 엘리엇 씨에 질투를 느낀다. 한편 앤은 어퍼크로스, 라임을 거쳐 바스에 도착하며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 먼저 가족과 가까워지려는 엘리엇 씨가 진실되지 않음을 직감하고, 레이디 러셀의 판단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다. 둘째, 레이디 달림플이 아닌 학교 동창 스미스 부인의 선약을 택함으로써, 가족의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보인다. 가족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모습을 버린 것이다. 셋째, 연주회장에서 만난 웬트워스에게 먼저 다가가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인다. 시골에 묻혀 있던 지성과 아름다움은 바스에서 빛을 발한다.


오스틴은 앤의 목소리를 빌려,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에, 남성들이 부여한 '변심하는 여성'이 되어야 했던 이들 말이다. 연인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패니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며, 웬트워스에 대한 마음을 내비치는 앤과 하빌 대령이 나눈 대화는 감동적이다. 이후, 그들을 갈라놓았던 그 '설득'에 대해, 앤은 "모험이 아니라 안전을 권하는 설득에 따랐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에 웬트워스는 "수천 파운드를 벌고 영국에 돌아왔을 때 연락했다면, 다시 약혼했겠느냐"고 묻고 앤은 긍정한다. 지금의 기준에선 여전히 수동적으로 느껴지지만, 앤이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웬트워스는 다시 행복해질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조건 때문에 파혼당한 남성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돌아왔을 때, 팔 년 전 자신을 찼던 여성을 선택할까? 그 반대의 상황에서도?


제인 오스틴은 '사랑'이 결혼의 동기는 될지언정 필수 요건은 아니었던 시대를 비웃으며, 주인공들에게 사랑과 경제적 능력을 동시에 쥐어준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도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미덕으로만 느껴지는 일편단심이 남성에게도 요구됨을 보여준다. ​소설이 출간된 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 청춘남녀가 상품으로 기능하는 결혼 시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젠트리 여성으로서 제한된 삶을 살았던 오스틴의 섬세한 글, 그 낭만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여전히 많은 것은 아마도 그 때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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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4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4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5-10-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었는데도 에이바님 리뷰를 참말 재미있게 읽었네요.
글이 참 좋아서 아는 이야기지만 정리가 쏴아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ㅎㅎ

에이바 2015-10-14 18:28   좋아요 0 | URL
오스틴 작품 중에 제일 좋아하고 또 가장 성숙한 작품이라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단발머리님.

한수철 2015-10-1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궁금했던 점 하나.

책 읽을 때 `항상` 메모하세요?


잘 읽었습니더...^^

에이바 2015-10-14 18:32   좋아요 0 | URL
보통은 인덱스 활용하려 하는데 그냥 넘어갈 때가 많아요. 메모는 내용이 방대하거나 할 때 하는데 흐름이 좀 끊겨서 지양하는 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