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필립 로스는 거대하다. 그는 진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음.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 비주류가 뭘까? 


비주류. 


주류, 라는 말이 지금 나에게 왠지 모를 얄미움이 있다. 인기가 많고 돈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다른 별에 사는 고등학생처럼, 어쩌면 항상 정직하고 예의바른데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재미없지 않은 이런 이미지. 그에 비해 비주류는 번개머리에 껄렁껄렁하고 시덥잖은 소리만 하고 항상 인기있고 싶은데, 그리고 또 좋아하는 여자도 있어서 그 여자한테 잘보이려고 하면 할 수록 밉상이 되는, 그런 불운의 이미지. 라고 하면 될까? 


영화계에서는 (위의 쓸때없는 묘사와는 다르게) 김기덕, 이라는 거대한 비주류가 있다고 한다. 그가 비주류라면 주류/비주류의 기준은 무엇일까? 충무로와 김기덕? 잘 생각해보면 비주류라고 칭해질 수 있는 어떤 것(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들은 항상 주류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사실이다. 주류가 싫어 비주류가 되려고 노력했든, 주류가 되지 못해 비주류가 되려고 노력했든 언제나 그들이 비주류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주류의 인정, 혹은 선택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앞에서 예를 든 김기덕 감독인데, 만약 그가 영화제 수상경력이 없었더라면 그는 영화계 - 비주류가 아닌 비영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탓인지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순수한 존경이 없는 듯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김기덕 감독님 영화는 어때요? 라고 묻는다면 아, 그 사람 영화는 강렬하고 좋은데 뭔가 좀.. 이 뭔가 좀이 바로 비주류에게 걸리는 어떤 것이랄까? 


여자, 성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혹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처음에는 박해의 대상이었다가 시대가 변하고, 그 변함의 증거를 내밀듯 그들의 위치가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누구나 말한다. 여자들과 남자들을 차별하지 말자고.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이 당해왔으니까. 마치 이런 느낌이다. 나는 너를 차별하고 싶지만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을 거야. 도덕이라는 것, 상식이라는 것이 예전의 부당함을 가로막는듯한 모습. 여기에는 평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본 영화에서 레즈비언인 여자에게 형사가 묻는다. 


여자들은 뭘 하나요? 

무슨 질문을 하고 싶으신거에요? 

여자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걸 꼭 답해야 하나요? 

아니,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손으로 해요! 하나로! 두개로! 세개로! 씨발새끼. 


여기에서, 남자는 절대 여자에게 형사의 심문이라는 공권력을 들이대지 않는다. 그건 정말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기 때문에. 폭력은 이렇게 변질된다.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사람들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너는 왜 동성애를 싫어하느냐고. 대답은 다양하지만 그 중 제일 터무니없는 대답은 그게 정상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정상적인거야. 너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자는 것이 상상이 가? 그건 비정상적인거야. 세상이 그걸 허용하면 애들은 어떻게 낳고? 그러다 인구가 줄어서 세상이 망하는거야. 라는. 


엄청난 비약에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나는 거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잔다, 라는 것에는 납득했던 것 같다. 성기와 성기의 결합만이 완전하다는 것은. 그런데 누가 알겠는가, (비약하자면) 수 많은 방법으로 여자와 남자는 결합할 수 있는데(예를들어 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기와 성기의 결합만이 완전한 어떤 것이라는 주장만 사라지면 그 사람은 여-여, 남-남의 섹스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닌데 나는 남녀의 섹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그게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냐는 문제는 별도로 나에게 섹스는 항상 그 섹스라는 단어 + 어떤 것, 이라는 공식으로 항상 무언가가 딸려들어오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몽상가들을 봤다. 혁명과 영화는, 어떤 관계일까? 더 넓게 혁명과 예술은, 혹은 유희는 어떤 관계일까? 문득 드는 생각은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바꿀 의지와 좋은 방향을 제시할 능력이 있는 것이 혁명가라면 예술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 


2. 이렇게 본다면 혁명을 선동하는, 혹은 혁명을 예찬하는 영화는 그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불쾌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영철 평론가의 말.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가면 나머지 두 혁명은 유예된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 마르크스와 랭보와 아방가르드 단체를 인용한 그의 글에서 진실(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이 읽힌다. 그리고 항상 진실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영화 중에, 예술 자체가 혁신한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3. 예컨대 남쪽으로 튀어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영화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자면 적어도 공감의 측면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 안에서' 뛰어난가? 쉽게 긍정할 수 없다. 사실 예술 자체의 혁신에 관해서 이 영화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관심의 차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어쨋든. 결국 이 영화는 '정치색이 강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이 거추장한 수식이 붙어버리면 영화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니게 된다. 그저 개인의,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선전물로 되어버릴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런 영화를 찍을래? 라고 물어봤다면 아니, 라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말이 영화가 매혹적이라는 것과 같을 수 없다. 


4.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이것들은 방법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지영 감독은 언제나 말한다(동시에 행한다). 영화는 언제나 운동이라고.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운동과 영화로서의 운동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 사이의 골이 정지영 감독에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그 골은 그 곳에 있으니까. 문제는 이것이다. 혁명, 즉 어떤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실천과 그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서 무엇이 더 낫다라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낫다'라는 판단 후에는 보다 좋음 - 좋음 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수직관계가, 그 수직관계에서 어떤 폭력이 발생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을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아니야, 라고 말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