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평전 -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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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먹고 살겠다고 옛 선조들의 은덕과 그 정신을 멀리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마음에서 책을 듭니다. 조선말 상당한 부유한 집안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잃은 설움과 되찾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현재 시세로 약 600억 상당의 재산을 몽땅 정리해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식솔 60 여 명을 이끌고 춥디 추운 만주로 도망치듯 떠나간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지는 않을지언정 조용히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감에도 누가 욕을 할 사람은 없지만, 당시 주어질 수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양반의 가문임에도 노비를 해방시켰고 형제들을 설득시켰습니다.

 비록 제일 앞장서서 나서는 자리를 싫어했기때문에 그가 쌓아온 명예는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고귀했습니다. 재산을 정리한 돈으로 만주에 땅을 구해 독립투사들의 산실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희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잔악한 손길이 만주까지 미쳐서 중국 내 현지인들과 함께 조선에서 탈출해온 사람들을 몹시 괴롭히던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무장투쟁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국과 해외동포들로부터 마련하기 어려웠고, 선생은 직접 구하기 위해 귀국까지 하는 동 노력했지만, 모금은 커녕 사흘 간 죽 한 두그릇만 먹을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까지 처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중국으로 몰려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으나 많은 파벌들의 운동노선으로 인해 쉽사리 굴러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분란을 조정하기 위해 하나의 정부기구로 가는 것보다는 여러 노선과 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연합할 수 있는 독립연합 총본부 형식을 주장하였으나, 위원직 선출에서 분규가 일어나게 되고, 민족진영, 자유진영, 공산진영 등의 분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이회영 선생으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떠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선생은 노선은 다를지언정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연합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던 혜안을 지녔습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선생의 고난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자금줄이 막혀 아내는 고국으로 돌아가 생활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선생은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겨 음식을 구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여러 운동가들과 고류를 하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는 어감으로 해석이 되었는데 마치 정부를 부인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의미로 오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정부의 권위과 명령, 복종의 요구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이 침해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부라도 개인의 자유를 억누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자유를 지닌 개인들이 정부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하면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는 제 3의 대안이 가능한 사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치적 이웃 국가인 미국도 여러 자치적인 연방정부가 뭉쳐서 한 나라를 이룬 것도 노선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해 가능한 케이스입니다.


 이는 선생이 아나키스트의 선봉장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선생은 전통의 성리학 대신 실용적인 양명학을 수학하고 한 명의 엘리트로써의 영웅론을 배격했었고 일반 개인 하나하나의 의지를 소중하는 차원에서 아동교육에 관심을 갖고 무관학교 설립등을 통해 청년의 교육에 대해서 우선 시 한 것에서 그 의지가 드러납니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는 엄연히 다르고 혁신적인 사상임을 이 책을 통해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또한 하나의 권위를 강요하는 사상이 될 수 있고, 민족주의 또한 타 민족의 자유를 훼손할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자체는 또다른 나라를 만들어 국민들을 복종시키는 목적이 아닌 자유를 탈환하는 민중의 의지를 보여주는 운동으로써 해석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알려진 '의열단'을 이끄는 약산 김원봉의 무장투쟁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김원봉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아나키스트로써 의열단을 창단하는 것에 많은 공로를 이회영 선생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에 선생은 아나키즘의 현실 적용을 위해 이상촌 건설등을 노력했으나, 결국 자금과 현실의 벽에 가로 막쳐 좌절되었던 상황에 점차 나이를 들어갑니다. 다만 '무련' 을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의열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감행하였습니다. 생애 말년에 만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지속하려고 했으나, 사상적 동지였던 김종진이 만주에서 암살당하며 또 계획이 무산되고 맙니다. 여러 등지를 다니며 고생하다가 만주로 돌아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려고 할 찰나 어이없이 일경에게 붙잡혀 옥사를 당합니다.  

 

 선생은 끝내 광복을 목도하지 못하고 별세하였지만,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 그 조국에 있는 우리들은 영원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수준을 넘어 선생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일깨워줬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아나키즘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받고 자율성을 정부에 의해 또는 타인의 의해 침해 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기에 우당 선생의 가르침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사색을 많이 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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