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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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어준 자연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 자연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혹은 집 근처 작은 공원으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치유와 위로를 받는다. 그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자연 어딘가로 나아가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자연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과 촉촉하게 내리는 비, 그리고 나를 향해 내리쬐는 햇빛이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연이다. 나 역시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 자연을 생각한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비롯되었던 곳, 그리고 앞으로 내가 돌아갈 곳이기에 자연을 떠올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자연을 떠올리고 나서 굳이 자연으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자연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다. 깊은 절망을 느낀 어느 날, 나는 나를 향해 비치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느꼈다. 빛이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것을. 이 말은 정말 빛만이 나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다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빛 그 자체가 주는 존재감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떠올린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빛은 언제나 나의 유일한 친구야.’


배리 로페즈가 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에서도 자연을 유일한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작가가 자연을 통해 힘을 얻은 순간순간을 담은 일기와도 같은 글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부모의 지인이자 요양병원 의사인 한 남성에게 오랫동안 성폭행을 당한다. 치료 목적이라는 말로 다가오는 남자에게 어린아이는 공포를 느끼지만,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끔찍한 시간을 견뎌낸다. 공포에 압도된 그 어린 생명에게 그래도 살아갈 힘이 되어준 건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한 줄기 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빛은 그의 존재 이유가 되어주었다. 작가는 그 빛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건 언젠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기도 하고 온전히 자기 존재가 받아들여진다는 긍정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큰 힘을 얻는다.


분명 빛에서 존재 이유를 발견했지만, 작가는 자연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자연이라는 대상은 더 또렷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는 자연을 언어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에 대한 분석을 유보하며 결국엔 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자연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을 받았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리라.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은 자신에게 크게 확장되어 다가온다. 그건 엄습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끌어안는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의 힘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연을 알려고 하기보다 그저 자연을 향해 몸을 맡긴다. 그가 배 위에서 폭풍을 마주하면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던 것은 자연이 보여줄 미지의 세계를 긍정했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경험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자연의 광대함을 새롭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지나간 일이라며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이라는 트라우마는 작가의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는 이 있었다. 그리고 처럼 느껴지는 자연이 곁에 있었다. 빛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크나큰 고통이 주어졌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우리 대부분은 작가가 겪은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그 경험에서 우리가 입은 상처는 비록 어느 정도는 아물었을지라도 그 흔적은 분명히 남았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이 왜 주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길을 마주한다. 나 역시 희망과 기대가 끊긴 것 같은 절망을 느끼면서 그 상황 속에서 몇 날 며칠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온 찬란한 태양의 빛이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내 고통의 순간이 극심했다고 한들 작가가 어린 시절 당한 고초와 비교할 수 있으랴. 나 역시 내 삶에 빛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 없었다면 아마 작가의 글을 그저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자연으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받고 치유의 과정 가운데서도 자연의 섬세한 위로를 받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가올 고통의 순간에 나 역시 조금은 의연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는다. 그 어려운 고비를 지난 후에 아마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이 내게 빛이 되어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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