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릴케전집 1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용민 옮김 / 책세상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애드거 앨랜 포우의 소설 <라이지아>에서 나오는 인상적인 색채로 토성의 납빛이 등장한다. 무슨 빛깔인지 모른다. 포우도 알리가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나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황금처럼 빛나던 문자가 사랑하는 애인을 잃었을때 퇴색되어 나타나는 그 느낌.

말테가 이국적 도시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할때 그렇게 흐려진 빛깔로 채색되는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채 표류하는 인생들, 자신의 존재마저 불안해하는 청년 예술가의 의식의 흐름은 납빛처럼 흐려진 대도시를 뚫고 지나간다.

제임스 조이스의 기법에 조금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쉽게 대할 수 있었다. 쉽게 읽었다는 것은 이해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감동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의미이다. 의식의 흐름, 곧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이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큰 기쁨을 얻었다.

윤동주의 시 <별헤는밤>에서 다정한 어감을 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거기 나오는 강아지, 토끼 등의 동물이 이 작품에서도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엄숙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와 풍성한 감수성으로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소리보다 무서운 정적, 개짖는 소리에서 전달되는 이미지, 한가로운 가게의 묘사, 시에 대한 논평, 임종의 장면에 대한 묘사, 생일날의 고통스런 수술, 찬란한 침묵이라는 시어가 주는 여운은 압권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는 부분은 어려웠고, 돌아온 탕자의 재해석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약간 무리가 있는 듯 싶다. 최고의 경지로서 신에 대한 사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신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적 재능을 주신 분이 시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

삶과 의식이 흐려진 세계에 생명을 주고, 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와같은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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