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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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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화에는 항상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대중의 이목과 관심을 끌며 호흥받는 것을 주류, 대중에게 외면받고 특정 층에서만 호흥받는 것을 비주류 라고 한다면, 우리네 삶은 항상 주류와 가까이 가려고 애쓴다. 이 주류란 무엇인가, 길고 지난한 교육과 자본의 산물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미술교육과 좋은 화구들을 통해 그려진 많은 그림들이 우리가 알고있고, 만나려 하는 미술의 모습이다. 이것은 책, 영화, 음악 어느것에도 통용되는 것들이다. 대중은 항상, 우리 대중이 만들지 않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만든 작품들에 열광하고 탐닉한다. 실질적으로 그들보다 더 많은 이들의 대중이 '스스로' 이야기와 작품을 만듦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들은, 앞서말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 좋은 환경에서 실제로 높은 퀄리티의 작품들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반면에 그런 것들에 길들여진 인식이, 그런 형식의 것들을 높은 퀄리티라고 인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길가에 핀 꽃 한송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 산천에 핀 수놓은 꽃들을 더욱 아름답다고 인지하기가 쉽듯이 말이다. 또한, 보통의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작품들과 다르게 소위 배운 이들이 만드는 희소성에도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문학작품과 음악에 한해서는 왜인지 이런 예는 무의미할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는 것은 거의 성장과정에서의 본능적인 한 코스와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짓는것과 음악을 만드는 일은 그에 비해선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라서도 말이다. (이것은 표면에서 비롯된 상대성을 이야기한다) 

 어쨌든, 모든 인간이 예술적 기질을 가질수는 있지만, 모든 이들이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거나, 만들지는 않는다. 또한 많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역사에 남거나, 어떤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지거나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항상 우리의 인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먼, 기성화가, 기성작가, 기성감독, 기성가수 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라고 일컬어 지기도 하는 것들. 미술관에 가서 유명한 한장의 그림에는 온갖 정성과 정신력을 쏟아부음에도, 실제로 많은 이름없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실제로 접하기도 힘들고, 그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비난, 비판의 의도가 없는) 현실이다.  

물론, 대중들이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고 만드는 일이 이제 낯선 일은 아니다. 이 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글, 만화, 영상, 음악 등 많은 분야에서 지금은 인터넷이란 창구를 통해 접하고, 또 생산해간다. 이런 각각의 부분에 두터운 매니아 층이 있음도 사실이다. 사실 소수가 많든 문화에 반하는 문화는 항상 있어왔겠지만, 그 표현의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헌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 수많은 것들을 얼마나 대중들이 기억하고 인식하느냐다. 매니아나 인지도가 얼마나 늘어나든, 결국 수많은 대중들을 움직이는 것은 주류 문화니깐 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민화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곧, 지금껏 있어왔지만, 그 수만큼 조망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숱한 문화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항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대표 미술들이 아닌, 음지 아니, 평지에서 그려지던 자유 분방한 민화를 담는다. 김홍도나 신윤복등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만을 접하기 쉽고, 그보다 더 다빈치나, 고흐,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들만 접하기 쉬운 우리의 미술세계를 벗어나, 마치 액자(틀)를 거부하고, 그 틀 바깥에서 끝없는 자유와 불규칙을 즐겼을 민화들을 말이다. 

집안의 재정 상태와 신분, 환경, 그에 따른 정형화되고 집단적인 교육은 의도하든 아니든 어떤 틀을 만들었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묘사나, 비율과 배치, 혹은 원근법이나 투시법 등 방법적인 접근부터, 좋은 작품의 기준이라는 것 까지, 그들이 정한 틀 안에서 그것들의 수준이 결정되기도 했을 것이다. 굳이 이 틀을 나쁜것이라 부를 필요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분명, 좋은 교육이나 환경은, 그만큼의 학습을 거두지 않고서는 따라할 수 없는 예술적 경지에 다다랐다. 하지만 문관이 있으면 무관이 있듯, 유무형의 틀 밖에서 그려졌던 많은 그림들도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 서양에서는 환경과 상관없이 비교적 다양한 화가들이 알려진 반면에, 실제로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우리화가 들은 그 수가 손꼽을 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민화는 그 특성상 작가를 알기가 거의 어려워 보인다. 이 책 또한 화가가 아닌 그림을 다룬다) 

틀 바깥, 그러니깐 좋은 교육과 환경에서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 '민화'의 가장 큰 특징을 작가는 '자유로움'으로 꼽는다. 신분에 의해 사상과 활동의 제약이 많이 따랐을 화가, 혹은 사대부 들과 다르게 먹고사는 보편적인 모습을 제외하면, 그들은 어떤 사상과 활동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거리를 그리지 않았다고 해서 귀향을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방안에서 주경야독 해야만 하는 이들과 다르게 일상에서 항상 자연과 부대끼며, 상대적으로 제약이 없었을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처음 책을 펼치자 마자, 민화가 보여주는,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생소한 그림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상상력은 가히 '충격'으로 느껴졌다. 수많은 시간이 지난 민화가 대담함은 물론이거니와, 이토록 놀라운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풍속화', '수묵화' 등을 우리 옛 조상들의 상징과 같이 생각해온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지와 무관심이 참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될 정도로 말이다.  

자연을 담은 민화들은, 그 형태와 배치, 비율등이 기존의 통념을 벗어난다. 보이는 그대로, 혹은 '보여져야 할' 그대로의 모습을 벗어나,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과, 상상한것, 혹은 그렇게 그려보고 싶은 것에 대해 거침없는 그림들을 표현해낸다. 문자도와 같은 경우는, 그 형태와 상상력또한 놀랍거니와, 실제로도 주술적 성향을 띄었다고 하니, 마치 이우혁의 '치우천왕기'에서 문자를 하나의 주술적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 절로 떠올랐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두려움의 대상을 풍자와 해학으로 극복하는 민중들의 의식또한 엿볼 수 있었다. 용에 관한 그림은 신화 혹은, 유행과 연결되있는 모습들도 보여준다. 

여러 민화들을 만나는 동안,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삶과 애환, 나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어떤 미신과 신앙을 더듬어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배층이 그린 그림들과의 비교를 통해 민화가 어떻게 틀에서 벗어나 있는지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길상과 벽사를 위한 것임이 아닌 풍자와 해학을 위한 목적까지 엿봄으로써 고통받는 민초들이 삶을 견디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상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림, 한편 한편의 민화를 통해, 가늠할 수 없는 가치를 알아보고, 그 시대의 문화의 흐름, (즉 사상이나 문화, 도구의 유입) 뿐만 아니라 생활의 변화에 따른 (극단적으론 전쟁과 같은) 인식과 관심사, 그리고 그에 따른 작품의 변화 또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민화에 대해서 우리나라보다 실제로 해외에서 더 알아보는 가치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말이다. 이런 민화들이 적잖이 해외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아쉬움이자, 아픔이기도 했다.

 

<닭과 모란>, <신구도> 에서 보여주는, 그간의 인식을 깨버리는 대담하교 자유로운 표현과 상상력에서부터 시작하여, 불로장생/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십장생도>같은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여정은, 민화에 대한 작가의 애착, 나아가 민화에서 뻗어나간 이런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대범함이 존재하고 또 인정받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염원을 이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게는 민화의 생명이 꺼지지 않고 우리 후손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과, 크게는 이런, 자유로운 정신이 끊임없이 우리의 세계의 곳곳에 또 존재하기를 바라는 염원 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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