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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신화 마로 시리즈 (Maro Series) 6
김보영 지음, 김홍림 그림 / 에디토리얼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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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이야기. 삼국사기의 일부 기록을 씨앗으로 삼아 진화가 빠르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을 펼친다. 영화 서던 리치가 생각나기도 한다. 일러스트도 멋지게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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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형추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1
듀나 지음 / 알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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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지만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한국 SF계의 살아있는 역사, 듀나 작가의 신작 <평형추>를 읽었다. 듀나는 20여 년 전 PC 통신 게시판에서 SF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작가가 '한국인'이 등장하는 'SF'를 쓴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 후 꾸준하게 큰 기복 없이 많은 SF 작품을 써 온 그는, 한국 SF의 중흥기(?)를 맞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 5월 장편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를 발표한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장편 소설을 낸 것이다. 장편이지만 읽기에 부담스러운 양은 아니다. 책은 아담한 판형에 페이지 당 글자 수도 많지 않다. 내용도 무거운 주제를 깊이 탐구하기보다는, 경쾌한 터치로 여운을 남기는 편이다. 동시에 소설이 다루는 공간적, 심리적 스케일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며 히로에 레이의 만화 <블랙 라군>이 떠올랐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적도에 설치되는 게 이상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일단 작중의 배경이 되는 '파투산'은 열대지방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아는 게 적어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동남아권의 문화적 토대 위에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합법과 위법이, 도덕과 타락이 골고루 섞인 멜팅팟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출판사의 설명을 보니 인도차이나, 수마트라 문화권의 영향을 표현했다고 한다.) <블랙 라군> 속 가상도시 '로아나프라'가 바로 그렇다. 다른 게 있다면, <평형추> 속 로아나프라에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듀나 작가답게, 이번 소설에도 다양한 SF 요소가 들어있다. 사실 사이버펑크 SF에서는 이미 식상할 수 있는 요소다. 지상과 우주를 잇는 궤도 엘리베이터(소설의 제목 <평형추>는 원심력으로 줄을 잡아당겨 그 장력으로 엘리베이터의 구조를 유지시키는 장치다), 국가 권력을 위협하는 거대 기업 LT의 경제적, 사법적, 정치적 지배, 뇌 속의 임플란트 식 컴퓨터(웜), AI와 융합해 인간을 초월해 가는 인간상(영화 <루시>에서처럼) 등. 그러나 그 요소들이 맛깔나게 버무려져 향신료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볶음밥이 되었다. 1인칭 화자의 독백에서는 시니컬하고 관조적인, 쌉싸름한 하드보일드 첩보물의 맛이 감돈다. SF와 첩보를 결합한 장르에 흥미를 느낀다면 배명훈 작가의 소설 <은닉>도 추천한다. <평형추>와 <은닉> 둘 다 SF 작가가 쓴 첩보물인데, 전자가 SF에 가깝다면 후자는 첩보물에 좀 더 가깝다.



책을 펼치자마자 독자는 낯선 세계의 긴박한 상황에 던져져, 1인칭 화자의 독백 속에서 이 세계의 구성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마치 게임처럼 느껴지고 몰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고, 책 속의 세계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종종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 등장해 독해 속도를 더 깎아먹기도 했다. 결국 소설의 전반보다는 세계에 익숙해진 중후반이 훨씬 재밌게 느껴졌다. 소설 속 배경인 '파투산'은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전체가 계단식 구조에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거대 계획도시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은 '내장'이라 불리며 쓰레기 처리장 등 혐오시설이 위치한다. AI가 각 장소마다 테마가 되는 곡조를 정해놓고 변주해 들려준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월레스 사 로고송이 생각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간 노동력이 로봇으로 대체된다. 소소할 수 있지만 이런 '새로운 세계(시대)에 대한 설정'이 가장 마음껏 즐긴 포인트였다.



소설은 빠르게 읽히고, 재미있다.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전개가 영화적이다. SF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반대로 말하면 SF 영화에서 많이 본 것만 같은 이미지나 전개가 나온다고도 할 수 있겠다. 중요한 인물을 여성이나 동성애자로 설정하고, 그 부분을 가능한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노력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히 김재인은 털털한 성격에 AI와 친밀도가 높으며, 새로운 차원으로의 진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에서 좀 더 비중이 크거나, 좀 더 일찍 등장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김재인의 과거나 그의 속내가 많이 궁금했다.



결국 '인간 둘과 궤도 엘리베이터의 삼각관계'로 요약될 수 있는 신기한 작품이다. 소설을 읽어보시면 어떤 뜻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알마의 페이스북 소개 글에는 궁금할 수 있는 설정을 잘 정리해 놓았는데, 특히 책 표지 그림의 의미,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연합뉴스의 책 소개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 파투산의 뜨겁고 눅눅한 공기 속에서 목숨을 건 두뇌싸움과,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하는 경험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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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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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치 않은 이름이어서인지 천명관 작가의 이름 석 자는 내 기억에 꽤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직 그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스펙터클하고 웅장한 이야기를 그릴 것 같다는 느낌이 막연하게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조바심도 일었다.


그렇게 달변가이자 이야기꾼이라는 그의 대표작, <고래>를 집어 들었다. 과연 대단했다. 500쪽을 넘어가는 두툼한 분량이 전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흡인력 있고 뒤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의 힘이기도 했지만, 방대한 줄거리를 읊으면서도 힘을 주어 묘사할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구분하는 완급조절이 능란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종종 나오는데, 일면 뻔뻔하다고도 생각되지만,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메타적인('메타 게임'에서처럼) 요소가 엿보여 재미있다.


"(...)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훗날 다른 자리를 기약하기로 하자.

독자여, 부디 이해해주시길!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며

더 많은 지면과 오랜 시간, 그리고 고통을 감당할 용기와 눈물이 필요한 일이므로."

p.165, <고래>, 천명관


소설을 읽는 내내 독특한 느낌을 받았는데, 천명관 작가를 소개할 때 흔히 붙는 수식어처럼 "기성 문단의 작법"에서 벗어나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우선 작품은 가상의 도시 '평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6.25 전후의 생활상 변화, 역사적 사건이 끼친 문화적 충격 등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더군다나 걸쭉하고 예스러운 순우리말 표현(감복하며 읽게 된다)과 인물들의 말투 때문에 얼핏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반복해 등장하는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라는 문장이 그런 '역사소설적 분위기'를 여지없이 깨트린다. 이처럼 판타지와 본격소설, 역사소설과 현대 소설 사이의 의도적인 줄타기가 <고래>에 특유의 긴장과 개성을 불어넣고 있다.


*** 이후 소설 내용의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


이야기는 평대의 벽돌 공장에서 시작되어 벽돌 공장에서 끝나는 수미쌍관 구조다. 처음, 갓 출소한 춘희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벽돌 공장을 둘러보며 막막함을 느낄 때, 앞으로 전개될(또는 이미 벌어진) 화려하고도 굴곡진 이야기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이야기를 허겁지겁 읽어가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 거대한 영화(榮華)가 삭막한 폐허로 스러지지 않기를 기대하곤 했다. 결국 벽돌 공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이미 내리막을 타기 시작한 이야기가 일말의 자비를 남겨놓으며 연착륙하기만을 바랐다.


다시 한번, 주요 인물을 따라가자면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중 가장 정이 가는 인물은 역시 춘희다. 등장인물 중 가장 순수하고 무구하며, 주제넘은 야망도 없었다. 단지 성별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외모와 완력(비슷하게 거구에 장사였으며 과묵했던 '걱정'은, 남성이어서인지 뭇사람들의 우러름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의사소통 수단의 부재(물론 文과의 경우에서 보듯 충분한 시간과 상대의 세심함이 있다면 춘희는 언어가 아닌 수단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불운함으로 인해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보내야 했다. 춘희는 죽고 나서야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인정받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세상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면, 딸아이나 '트럭 운전사'를 잃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금복에게도 자꾸만 마음이 간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용기를 내 항구 도시로 왔고, 건어물 생산 시설과 유통망을 구축하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부를 일구었다. 열정적으로 빠져든 '걱정'과의 행복한 한때도 잠시, '걱정'의 큰 부상 이후 육체적, 정서적 가정폭력과 가난으로 금복은 지쳐가고, 결국 '칼자국'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하게 된다. 이후의 전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범상치 않은 능력과 운으로 쌓아올린 부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금복은 자꾸만 결정적인 순간에 모종의 운명에 의해 거꾸러진다.


금복에게 어떤 죄가 있었는가? 누군가는 바람기를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첫사랑이었던 '걱정'에 일편단심이었으며, 심지어 '걱정'을 죽인 것으로 오해하고 정이 들었던 칼자국을 망설임 없이 죽이기까지 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자유연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노파의 저주에 대해서도, 금복 나름대로 빚을 갚거나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해 내었는데, 결국 우연과 불운과 노파의 심술(초자연적 현상)이 겹쳐 그간 이룬 모든 것이 일순간에 재가 되어 버린다. 이쯤 되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를 이룬 여성(현대가 아닌 근대 한국에서라면 얼마나 더 지난했을까?)을 작가가 싫어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등장인물들이 거의 '성'을 매개로 관계를 맺고 거래하는데, 그 '성'은 금복과 '걱정'의 연애 초기를 제외하고는 일방이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건강하지 못한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두터운 서사를 갖지 못한 남성 인물들은 그저 성욕에 눈이 멀어 기회만 있으면 강간을 시도하는 짐승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여자들은 수동적으로 그들의 먹잇감이 되거나, 적극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즉,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성'에 천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라고 하기에는 끝까지 성생활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 춘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가? 시절의 냉혹함을 보여주려는 장치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고 난 뒤 뒷맛이 쓴 주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말의 가능성을 깊이 탐구한 유려한 문체, 생동감 있는 인물들, 속도감 있고 방대한 이야기, 그 속에 아낌없이 부려 놓은 섬세한 감정 묘사가 한 작품 속에 조화롭게 녹아들어 있음은 이 작품의 미덕이다. 작가의 이후 작품들은 <고래> 만큼의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듯도 싶지만, 그의 달변과 속도감, 익살스러움과 뻔뻔함을 빌리고 싶을 때 한 작품 정도 더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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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궤적
리베카 로언호스 지음, 황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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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금가지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물이라니! 책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구미가 당겼다. 평소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SF는 두말할 것 없이 내가 좋아하는 장르였으니까. 읽어보니 내 취향에서 야악간 벗어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꽤 매력적인 요소도 많은 소설이었다. <천둥의 궤적>은 <여섯 번째 세상> 시리즈의 첫 번째 권으로, 로커스 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로커스 상은 1971년, 휴고상을 예측하기 위한 리스트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매년 다양한 부문에서 SF, 판타지 작품을 선정, 시상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19년 'First Novel' 부문, 즉 신인상 부문에서 수상했다.


배경은 '큰물'이후로 망해버린 아메리카 대륙. 나바호 인디언(디네)들은 큰물이 닥치기 직전, 네 방향에 마법적인 힘이 깃든 거대한 장벽을 쌓아 재난과 연이은 폭동을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었지만, 역시 물자의 부족(예를 들면 설탕과 커피, 고기가 귀한 듯하다)으로 팍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에너지 전쟁도 일어나 물, 석유 등의 자원을 폭력집단이 사유화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트럭에도 휘발유 대신 위스키를 넣어 달릴 정도.


주인공은 역시 나바호 인디언인 막달레나(매기) 호스키. 일족은 호나가하니, 부계는 카하나아니. (나바호 인디언은 모계 중심이어서 가문을 밝힐 때 어머니, 아버지, 외할아버지, 할아버지 순으로 밝힌다고 한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나바호 인디언이다. 보통 미국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그만 백인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자연스럽게 나바호 인디언으로 설정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만 나바호 인디언을 매체에서 자주 접하지 않아서, 어떤 생김새일지 상상하기가 좀 어렵긴 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은 상세한 시각적 묘사다. 무심코 머릿속으로 미드 시리즈나 영화를 상상하며 읽게 될 정도로 묘사가 상세하고 풍부하다. 계속 인기를 끌어서 꼭 영상화되었으면 좋겠다.(특히 울끈불끈 근육질에 긴 흑발을 휘날리는 네이즈가니, '눈부신' 미소의 완벽한 미청년 카이 등 매력적인 인디언 남성들이 너무 궁금하다!) 주인공이 신고 다니는 모카신, 타흐 할아버지가 사는 집인 팔각형 호건, 전통 천막인 티피, 총알에 들어있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옥수수 꽃가루, 튀김빵과 칠리 등의 인디언 문화와 군데군데 등장하는 나바호 언어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디언 전통문화로만 도배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서부 영화스러운 분위기도 많이 난다. 회전초가 굴러가는 사막에서, 낡은 트럭을 끌고 다니며 벌이는 권총 액션이라던가, 야영이라던가. 또 인디언이라고 무조건 착한 사람들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자원이 부족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만큼)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칠게 살아가는, 일견 느와르 물의 느낌도 난다. 악하기만 한 캐릭터나 선하기만 한 캐릭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 여기서부터 소설 내용에 대한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좀 힘들었다. 주인공은 (네이즈가니의 가스라이팅 때문인 것 같긴 하지만) 피해 의식에 쩔어 있어서 인간관계에서 필요 이상으로 가시를 세우고, 좀처럼 사람을 믿지 못한다. 자꾸만 '아이고 이 답답아!'하며 읽었고, 고구마를 먹는 듯 답답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눈부신 미소'의 카이에게는 홀라당 넘어가기도 하고, 자신을 거두고 돌보았던 스승 네이즈가니에 대한 연모의 마음도 감추지 못한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이런 부분이 너무 하이틴 로맨스 같아서 몰입이 깨지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 초반, '클랜 파워'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 갑자기 이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낮아진 것 같다. 판타지를 아예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지의 제왕'을 기대했는데 '해리포터'가 나온 느낌이랄까? 영어 단어 '클랜'을 찾아보니 '부족, 씨족'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모계, 부계 일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초능력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주석으로 해석을 달아주거나, 약간의 설명을 붙이거나, 아니면 아예 우리말 용어로 번안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민속적인 느낌도 들고.


어쨌든 기대했던 것보다 깊이가 있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바호 인디언 전통문화를 코드로 한 판타지 모험물로서는 충분히 흥미로웠고,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책을 읽고 흥미가 생겨서 나바호 부족의 문화에 대해 검색해보았지만, 많은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나바호는 체로키 다음으로 큰 부족임에도. 미국이 개척시대에 이들을 얼마나 박해하고 학살했으며 지금 이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 책에도 기숙 학교, '종결', 매니페스트 데스티니, 평원의 대학살 등 인디언 역사의 아픈 국면들이 자연스레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한 민족의 역사적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민족에게 크나큰 비극임은 물론이고) 우리가 다양하게 변주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자원이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서브컬처를 좋아하니 일본의 예를 들어 보자. 거대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타입문 계열 컨텐츠를 보면 세계 곳곳의 온갖 문화적 코드(성경, 오컬트, 마술 등)를 차용해 그럴듯한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사실 어느 나라에나 민족에든 건국신화나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에는 매력적인 판타지 요소가 듬뿍 담겨있다. 그러니 아메리카 인디언의 독특한 문화 코드도 얼마든지 재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필두로 한 리베카 로언호스의 '여섯 번째 세상' 시리즈가 그런 역할을 톡톡히 했으면, 그리고 앞으로 더 다양한 시도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특히 영상화! 영상화가 시급하다! 왜 아직도 '늑대와 춤을'을 봐야 한단 말인가...! )


<번역/오타 제안>


황소연 번역가님이 전반적으로 번역에 공을 들인 느낌이었다. 나바호 인디언 전통문화가 많이 나와서 번역하기 까다로울 수도 있었을 텐데, 친절한 설명과 함께 크게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읽혔다. 미국 소설이라는 느낌은 나지만, 장면을 묘사할 때 우리말 표현을 풍부하게 활용해서 읽는 맛이 있었다.


+) 각주를 작가가 단 것인지, 번역가가 단 것인지 따로 '일러두기' 등에 언급이 없어서 아쉬웠다.


p.122~ 크라운포인트 도서관 관련 부분: CD를 '음반'이라고 번역함. 음반이라고 하면 음악이 여러 곡 담겨있는 매체를 떠올리는데(레코드, 씨디, 디지털 가릴 것 없이), 이 이야기에서는 원주민들의 구술 데이터를 담은 매체를 뜻하며, '시디플레이어'가 나온 걸로 봐서 CD인 게 명확하므로 '시디'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을 듯하다.


p.202 하단 "꼭 '가야' 봐야 해요." -> "꼭 '가' 봐야 해요"


p.281 하단 나'를' 얼른 클라이브에게 시선을 돌려 -> 나'는' 얼른 클라이브에게 시선을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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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정말 끝내주는데 에이플랫 시리즈 12
심완선 지음 / 에이플랫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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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귀한 SF 비평인데, 이렇게 따뜻하면서 깊이 있다니. 앞으로도 계속 심완선님의 비평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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