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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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치 않은 이름이어서인지 천명관 작가의 이름 석 자는 내 기억에 꽤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직 그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스펙터클하고 웅장한 이야기를 그릴 것 같다는 느낌이 막연하게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조바심도 일었다.


그렇게 달변가이자 이야기꾼이라는 그의 대표작, <고래>를 집어 들었다. 과연 대단했다. 500쪽을 넘어가는 두툼한 분량이 전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흡인력 있고 뒤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의 힘이기도 했지만, 방대한 줄거리를 읊으면서도 힘을 주어 묘사할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구분하는 완급조절이 능란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종종 나오는데, 일면 뻔뻔하다고도 생각되지만,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메타적인('메타 게임'에서처럼) 요소가 엿보여 재미있다.


"(...)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훗날 다른 자리를 기약하기로 하자.

독자여, 부디 이해해주시길!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며

더 많은 지면과 오랜 시간, 그리고 고통을 감당할 용기와 눈물이 필요한 일이므로."

p.165, <고래>, 천명관


소설을 읽는 내내 독특한 느낌을 받았는데, 천명관 작가를 소개할 때 흔히 붙는 수식어처럼 "기성 문단의 작법"에서 벗어나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우선 작품은 가상의 도시 '평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6.25 전후의 생활상 변화, 역사적 사건이 끼친 문화적 충격 등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더군다나 걸쭉하고 예스러운 순우리말 표현(감복하며 읽게 된다)과 인물들의 말투 때문에 얼핏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반복해 등장하는 "그것은 OO의 법칙이었다."라는 문장이 그런 '역사소설적 분위기'를 여지없이 깨트린다. 이처럼 판타지와 본격소설, 역사소설과 현대 소설 사이의 의도적인 줄타기가 <고래>에 특유의 긴장과 개성을 불어넣고 있다.


*** 이후 소설 내용의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


이야기는 평대의 벽돌 공장에서 시작되어 벽돌 공장에서 끝나는 수미쌍관 구조다. 처음, 갓 출소한 춘희와 함께 폐허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벽돌 공장을 둘러보며 막막함을 느낄 때, 앞으로 전개될(또는 이미 벌어진) 화려하고도 굴곡진 이야기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이야기를 허겁지겁 읽어가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 거대한 영화(榮華)가 삭막한 폐허로 스러지지 않기를 기대하곤 했다. 결국 벽돌 공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이미 내리막을 타기 시작한 이야기가 일말의 자비를 남겨놓으며 연착륙하기만을 바랐다.


다시 한번, 주요 인물을 따라가자면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중 가장 정이 가는 인물은 역시 춘희다. 등장인물 중 가장 순수하고 무구하며, 주제넘은 야망도 없었다. 단지 성별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외모와 완력(비슷하게 거구에 장사였으며 과묵했던 '걱정'은, 남성이어서인지 뭇사람들의 우러름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의사소통 수단의 부재(물론 文과의 경우에서 보듯 충분한 시간과 상대의 세심함이 있다면 춘희는 언어가 아닌 수단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불운함으로 인해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보내야 했다. 춘희는 죽고 나서야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인정받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세상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면, 딸아이나 '트럭 운전사'를 잃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금복에게도 자꾸만 마음이 간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용기를 내 항구 도시로 왔고, 건어물 생산 시설과 유통망을 구축하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부를 일구었다. 열정적으로 빠져든 '걱정'과의 행복한 한때도 잠시, '걱정'의 큰 부상 이후 육체적, 정서적 가정폭력과 가난으로 금복은 지쳐가고, 결국 '칼자국'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하게 된다. 이후의 전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범상치 않은 능력과 운으로 쌓아올린 부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금복은 자꾸만 결정적인 순간에 모종의 운명에 의해 거꾸러진다.


금복에게 어떤 죄가 있었는가? 누군가는 바람기를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첫사랑이었던 '걱정'에 일편단심이었으며, 심지어 '걱정'을 죽인 것으로 오해하고 정이 들었던 칼자국을 망설임 없이 죽이기까지 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자유연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노파의 저주에 대해서도, 금복 나름대로 빚을 갚거나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해 내었는데, 결국 우연과 불운과 노파의 심술(초자연적 현상)이 겹쳐 그간 이룬 모든 것이 일순간에 재가 되어 버린다. 이쯤 되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를 이룬 여성(현대가 아닌 근대 한국에서라면 얼마나 더 지난했을까?)을 작가가 싫어하거나 질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등장인물들이 거의 '성'을 매개로 관계를 맺고 거래하는데, 그 '성'은 금복과 '걱정'의 연애 초기를 제외하고는 일방이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건강하지 못한 형태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두터운 서사를 갖지 못한 남성 인물들은 그저 성욕에 눈이 멀어 기회만 있으면 강간을 시도하는 짐승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여자들은 수동적으로 그들의 먹잇감이 되거나, 적극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즉,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성'에 천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라고 하기에는 끝까지 성생활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 춘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가? 시절의 냉혹함을 보여주려는 장치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고 난 뒤 뒷맛이 쓴 주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말의 가능성을 깊이 탐구한 유려한 문체, 생동감 있는 인물들, 속도감 있고 방대한 이야기, 그 속에 아낌없이 부려 놓은 섬세한 감정 묘사가 한 작품 속에 조화롭게 녹아들어 있음은 이 작품의 미덕이다. 작가의 이후 작품들은 <고래> 만큼의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듯도 싶지만, 그의 달변과 속도감, 익살스러움과 뻔뻔함을 빌리고 싶을 때 한 작품 정도 더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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