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의 궤적
리베카 로언호스 지음, 황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금가지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판타지물이라니! 책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구미가 당겼다. 평소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SF는 두말할 것 없이 내가 좋아하는 장르였으니까. 읽어보니 내 취향에서 야악간 벗어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꽤 매력적인 요소도 많은 소설이었다. <천둥의 궤적>은 <여섯 번째 세상> 시리즈의 첫 번째 권으로, 로커스 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로커스 상은 1971년, 휴고상을 예측하기 위한 리스트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매년 다양한 부문에서 SF, 판타지 작품을 선정, 시상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19년 'First Novel' 부문, 즉 신인상 부문에서 수상했다.


배경은 '큰물'이후로 망해버린 아메리카 대륙. 나바호 인디언(디네)들은 큰물이 닥치기 직전, 네 방향에 마법적인 힘이 깃든 거대한 장벽을 쌓아 재난과 연이은 폭동을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었지만, 역시 물자의 부족(예를 들면 설탕과 커피, 고기가 귀한 듯하다)으로 팍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에너지 전쟁도 일어나 물, 석유 등의 자원을 폭력집단이 사유화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트럭에도 휘발유 대신 위스키를 넣어 달릴 정도.


주인공은 역시 나바호 인디언인 막달레나(매기) 호스키. 일족은 호나가하니, 부계는 카하나아니. (나바호 인디언은 모계 중심이어서 가문을 밝힐 때 어머니, 아버지, 외할아버지, 할아버지 순으로 밝힌다고 한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나바호 인디언이다. 보통 미국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그만 백인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자연스럽게 나바호 인디언으로 설정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만 나바호 인디언을 매체에서 자주 접하지 않아서, 어떤 생김새일지 상상하기가 좀 어렵긴 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은 상세한 시각적 묘사다. 무심코 머릿속으로 미드 시리즈나 영화를 상상하며 읽게 될 정도로 묘사가 상세하고 풍부하다. 계속 인기를 끌어서 꼭 영상화되었으면 좋겠다.(특히 울끈불끈 근육질에 긴 흑발을 휘날리는 네이즈가니, '눈부신' 미소의 완벽한 미청년 카이 등 매력적인 인디언 남성들이 너무 궁금하다!) 주인공이 신고 다니는 모카신, 타흐 할아버지가 사는 집인 팔각형 호건, 전통 천막인 티피, 총알에 들어있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옥수수 꽃가루, 튀김빵과 칠리 등의 인디언 문화와 군데군데 등장하는 나바호 언어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디언 전통문화로만 도배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서부 영화스러운 분위기도 많이 난다. 회전초가 굴러가는 사막에서, 낡은 트럭을 끌고 다니며 벌이는 권총 액션이라던가, 야영이라던가. 또 인디언이라고 무조건 착한 사람들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자원이 부족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만큼)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칠게 살아가는, 일견 느와르 물의 느낌도 난다. 악하기만 한 캐릭터나 선하기만 한 캐릭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 여기서부터 소설 내용에 대한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좀 힘들었다. 주인공은 (네이즈가니의 가스라이팅 때문인 것 같긴 하지만) 피해 의식에 쩔어 있어서 인간관계에서 필요 이상으로 가시를 세우고, 좀처럼 사람을 믿지 못한다. 자꾸만 '아이고 이 답답아!'하며 읽었고, 고구마를 먹는 듯 답답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눈부신 미소'의 카이에게는 홀라당 넘어가기도 하고, 자신을 거두고 돌보았던 스승 네이즈가니에 대한 연모의 마음도 감추지 못한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이런 부분이 너무 하이틴 로맨스 같아서 몰입이 깨지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 초반, '클랜 파워'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 갑자기 이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낮아진 것 같다. 판타지를 아예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지의 제왕'을 기대했는데 '해리포터'가 나온 느낌이랄까? 영어 단어 '클랜'을 찾아보니 '부족, 씨족'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모계, 부계 일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초능력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주석으로 해석을 달아주거나, 약간의 설명을 붙이거나, 아니면 아예 우리말 용어로 번안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민속적인 느낌도 들고.


어쨌든 기대했던 것보다 깊이가 있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바호 인디언 전통문화를 코드로 한 판타지 모험물로서는 충분히 흥미로웠고,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책을 읽고 흥미가 생겨서 나바호 부족의 문화에 대해 검색해보았지만, 많은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나바호는 체로키 다음으로 큰 부족임에도. 미국이 개척시대에 이들을 얼마나 박해하고 학살했으며 지금 이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 책에도 기숙 학교, '종결', 매니페스트 데스티니, 평원의 대학살 등 인디언 역사의 아픈 국면들이 자연스레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한 민족의 역사적 전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민족에게 크나큰 비극임은 물론이고) 우리가 다양하게 변주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자원이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서브컬처를 좋아하니 일본의 예를 들어 보자. 거대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타입문 계열 컨텐츠를 보면 세계 곳곳의 온갖 문화적 코드(성경, 오컬트, 마술 등)를 차용해 그럴듯한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사실 어느 나라에나 민족에든 건국신화나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에는 매력적인 판타지 요소가 듬뿍 담겨있다. 그러니 아메리카 인디언의 독특한 문화 코드도 얼마든지 재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필두로 한 리베카 로언호스의 '여섯 번째 세상' 시리즈가 그런 역할을 톡톡히 했으면, 그리고 앞으로 더 다양한 시도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특히 영상화! 영상화가 시급하다! 왜 아직도 '늑대와 춤을'을 봐야 한단 말인가...! )


<번역/오타 제안>


황소연 번역가님이 전반적으로 번역에 공을 들인 느낌이었다. 나바호 인디언 전통문화가 많이 나와서 번역하기 까다로울 수도 있었을 텐데, 친절한 설명과 함께 크게 걸리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읽혔다. 미국 소설이라는 느낌은 나지만, 장면을 묘사할 때 우리말 표현을 풍부하게 활용해서 읽는 맛이 있었다.


+) 각주를 작가가 단 것인지, 번역가가 단 것인지 따로 '일러두기' 등에 언급이 없어서 아쉬웠다.


p.122~ 크라운포인트 도서관 관련 부분: CD를 '음반'이라고 번역함. 음반이라고 하면 음악이 여러 곡 담겨있는 매체를 떠올리는데(레코드, 씨디, 디지털 가릴 것 없이), 이 이야기에서는 원주민들의 구술 데이터를 담은 매체를 뜻하며, '시디플레이어'가 나온 걸로 봐서 CD인 게 명확하므로 '시디'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을 듯하다.


p.202 하단 "꼭 '가야' 봐야 해요." -> "꼭 '가' 봐야 해요"


p.281 하단 나'를' 얼른 클라이브에게 시선을 돌려 -> 나'는' 얼른 클라이브에게 시선을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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