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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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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사는 시대가 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을까? 지금은 이상향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는 단어 ‘유토피아’는, 지상에 없는 곳이라는 의미로 토마스 모어가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그린 책이다. 책 내용을 전해들은 내가 했던 생각은, 정말 터무니없는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이었고, 유토피아라는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나라면, 이상향을 그렇게 꿈꾸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이루어지기 어렵게 느껴지고, 꿈꾸는 것 자체를 멍청한 것으로 취급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상향을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렇게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상향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걸까. 사실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면 이상향을 꿈꾸지 않는 게 좋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고, 온갖 부조리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는 계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다.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고,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p11 하는 꿈이다. 그걸 한국에서 실현하기에는 스스로가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어떤 것을 할 인물도 못된다고 스스로를 평한다. 그래서 호주로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호주에 가서도 제일 밑바닥 알바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사귀던 전 남자친구 지명에게서 전화가 온다. 계나를 사랑한다고, 호주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같이 살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백한다. 


“얘는 내가 지금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는 건가? 무슨...... 마치 자기를 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하며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같았어. 낙하산을 멘 건지 아닌지도 몰라.” p138


구원을 받으려는 건지, 안받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명은 사랑에서 그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녀가 지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절박하다. 그만큼 그녀를 사랑한다고, 상상 속에서 그녀와 일평생 함께하리라고 맹목적으로 믿어버린다. 그걸 계나는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라 일컫는다. 이 구원이라는 게 계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계나는 스스로가 지명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지명으로부터 과연 어떤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지 미심쩍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에 있는 것이 아닐수는 있다. 이 소설 안에서는 이런 사랑은 ‘빌딩에서 낙하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안하고 뛰어내리는’일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랑’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지명이 말하는 사랑을 계산하고, 그걸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질문한다. 그 질문이 무서웠다.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가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 지명은 사랑의 환상에 허우적대고, 계나는 사랑을 계산하여 측정하지 않는 지명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어느 것이 맞다 어쩌다 하기보다 이 두가지 모두가 지금 ‘사랑’이 겪는 현실이라는 게 섬뜩했다.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p155


계나가 바라보기에, 그녀와 지명의 사랑은 의좋은 형제의 처지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의좋은 형제는 괜히 서로를 사랑하느라 뻘짓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사랑해서 호혜적으로 편한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그렇기에 또 끊임없이 힘들 뿐인, 언제 지쳐 떨어져 나갈 지, 언제 그런 서로를 마주하고 경악하게 될 지 모르게 되는 사이. 이런 사이라는 것을 들키기 전에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계나는, 어쩌면 사랑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걸까? 계나의 이런 생각에 깔린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보였다. ‘사랑’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맞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걸까. 아니면 계나처럼 사랑에 대해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인 계나는 이런 형제의 처지에 빠져서 살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내가 그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명이는 자기가 주말에 쉴지 안쉴지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 데이트 계획 같은 건 세울 수도 없었어." p153


지명은 그가 그토록 되기를 바랐던,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여전히 고달프다. 계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에 꿈꾸고, 지명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이상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산다. 계나가 보기에 지명은 불안하다. 사랑 하나만을 믿고 지명을 따라가기엔, 자신과 지명의 처지가 너무 다르다. 지명은 열성적으로 자신이 꿈꾸던 일을 쟁취해냈고,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도 그런 식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계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계나는 그 간극을 버틸 다른 방법을 찾지만, 쉽지 않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p159


이건 계나가 여자라서만 겪는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에 있으면 ‘진짜 직업’과 다른 것들로 나뉜다. ‘진짜 직업’을 가진 사람만 대우를 받는다. 계나는 그런 차별대우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계나가 돌아보면, 계나의 가족은 전부 ‘진짜 직업’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면서 삶을 꾸려간다. 계나는 그것이 싫다. 계나와 계나의 가족은 한국에서 존엄성을 무시받는다. 그러면 호주는 다를까.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해.” p124-125


계나는 호주에서 베이스 점프를 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다. 작가는 이 베이스 점프를 계나의 삶과 빗대어 표현하려고 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행복하려고 시도하고, 그렇기에 호주에까지 왔건만, ‘베이스점프’를 그녀가 세든 건물에서 하게 내버려뒀다는 이유로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녀의 삶은 본디도 그다지 희망이 없었지만, 더 절망적으로 변해버렸다. 만약, 그녀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의 삶이 아니었을까.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어쩐지 마찬가지의 삶을 통과하는 중인 건 아닐까? 재앙이 닥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하고 빌고 있지만 이미 나 역시도 포함되어버린 삶을 사는 중인 건 아닐까. 어떻게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이 삶이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보일까? 나은 것으로 변할 수 있도록 조금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작가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계나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계나의 새로운 목표다.

지명처럼 사는 사람이 더 많을까. 계나처럼 사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알 수 없다. 자기계발서의 양을 보면 두 방향 다 비슷한 것 같다. 지명과 계나의 유토피아는 언제까지 유토피아로 남을 수 있을까. 유토피아는 곧 현실의 벽에서 스스로 비웃음을 생산해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만 하고,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비웃음당하지 않을만한 것일까. 하루하루가 사는 게 버겁다. 언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는 말에 찔리지 않는 삶을 살지는 몰라도 그렇게 발언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나 둘 만드는 것밖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에 안주하려 한다고 비난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라서 어쩔 수 없다면, 아주 조금씩만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란다.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여가에서도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 이런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 바보같은 일이라면, 그때그때의 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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