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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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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덕과 명예
도덕을 만든다, 한 국가, 혹은 공동체를 잘 지탱하기 위해 도덕은 필요하다. 이 도덕은 선입견의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공정하지 않은 도덕은 도덕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도덕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로서 개인이 온전히 사회에 어울릴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일은 선의를 가진 사람을 오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선입견, 자아도취, 등 
나는 조지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 읽어보면 소크라테스는 기존 관념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관습, 관념들이 소피스트의 밥벌이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지와 오해와 악의, 선입견들이 무고한 소크라테스를 죽였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한다면서 정말 자기가 생각하는 이성적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은 파훼한다. 쪼개고 나누어서 옳음을 증명한다. 잘잘못을 칼로 나눈다. 마치 아이를 둘로 나누어 해결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솔로몬처럼.(솔로몬의 판결은 정말 아이를 둘로 가르라는 의도에서 내려진 것은 아니라 알려져 있으니, 적절한 비유는 아닌가?) 그렇기에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애초 소피스트들이 그토록 선입견으로 꽉꽉 들어차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소크라테스는 그렇게까지 변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아닐 수도 있다.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인정한 것까지도, 소크라테스는 존중하고 인정했을 테니까. 소피스트들이 꽉막힌 사람이라 소크라테스를 더 몰아간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진리'자체를 믿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한 순수한 인물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떤 점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비판하고 싶은 것들을 비판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 믿는 순수함은 그 자체로 폭력으로서 상대에게 작용하기도 하니까. 어떤 것이 답일지는,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당시 희생당한 혹은 진리에 순교한 사람으로 비추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해석이 더 적절할까? 다른 해석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공격을 받은 소피스트들의 선입견은 밥벌이가 걸려 있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너를 찌른다.' 마치 전쟁터같다. 
전쟁중에도 도덕이라는 건 필요하지 않나? 어떤 평화가 더 좋은 평화인지는 수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고, 그 논의는 끝나지 않아야 하지만, 그 와중이라 하더라도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중요하다. 보통 전쟁중에는 평화라는 것이 어디로 숨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다르게 보이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역동하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고 믿는다. 피난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평화를 찾아 떠난다. 그러면 상대편이 적이라면서 적군을 죽이는 사람들은? 역설적이지만,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적을 죽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편은 죽이지 않는 '도덕률'을 적용한다.
스텐퍼드셔에서는 기이하게도 평화를 위해 조지가 희생된다. 조지를 위한 도덕적인 판단은 배제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조지를 제거한다. 조지는 터무니없는 고발과 변호와 증언때문에 감옥에 갇힌다. 죄가 없는데도. 앤슨 대위는 자신의 자아도취를 지켜내려고 조지를 계속 유죄로 몰고 간다. 그 일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방식을 지키는 일이고, 그가 손에 쥔 권력과 밥벌이를 지키려는 일일 것이다. 어쨋든 그들,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은 증거물 앞에서, 철저한 논증 앞에서 다시금 항복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밥그릇은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타자가 평화의 상태에 있지 않은데 내가 평화로우리라는 주장은, 도덕적이지 않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를 억누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소외된 조지가 그나마의 평화를 얻은 것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도덕적인간인 '아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다른사람에게만 평화로운 상황이 되어있는 이 불편한 상태를 바꾸려고 나선다. 그러니까, 도덕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떤 사람이든,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덕이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덕목이고 그건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인지시켜주는 동시에 함께 살 궁리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명예가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상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러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길일지도 모른다. 


마무리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아서 코난 도일', 그리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때문에 희생된 '조지 에들러' 그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철저하게 각자 화자의 시선에서 서술되었고, 그러므로 독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 않으면 화자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어느정도인지 잘 살피기 어렵다. 하지만 그게 많은 단서를 가져다준다. 어쩌면 이런 서술방식은 작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완하는 소설적 장치로서 사용되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작품성을(작품 내에서 모자란 점을) 작가와 긴밀하게 연결시키지 않아도, 그 자체로 화자가 결점을 가진 존재이므로, 소설가의 결점으로 읽히지 않고 화자의 결점으로 읽히는, 그렇기에 작품으로서는 나은 조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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