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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내 어릴적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을 꾼 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사람이어서 꾼 꿈은 아니었다. 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꾼 나 자신을 대단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도 행복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기뻐서 이것저것 살을 붙여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그로서 기쁨을 창출해내려는 조악한 시도였다. 그 시도는 곧 시도를 빛나게 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손쉽게 실패했다. 너무 거대한 꿈이라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꿈조차도 한없이 하찮은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
이 책은 내 어릴 적 꿈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에서 소외된 사람이 비참하게 짓밟히는 광경을 그대로 목도해야만 했을 때, 나는 소설에 개입하여 아무것도 못하기에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못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해야만 했던 나 자신을 소설에 비추어 봐야만 했기에 역겨웠다. 역시 희생당하는 사람을 제외하고서라도 그것을 목도해야만 하는 목격자도 속죄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연을 마주하면 거울처럼 그 심연이 나를 비추리라. 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만 행복해서는 진짜 행복이 아닌 것이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행복일 뿐. 아니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체 느끼는 조각난 행복이거나. 그렇기에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게 기억났다.
파르마코스(Pharmakos)란 ,
"고대 그리스어로 속죄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염병이나 기근, 외세 침입, 내부 불안 등과 같은 재앙이 덮쳤을 때,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 자체의 경비로 인간 제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파르마코스라고 칭했다. 소나 송아지 같은 동물들 이외의 인간 파르마코스는 대체로 희생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위험이 없거나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 가난한 자, 불구자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특히 르네 지라르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희생제의 속에 내재된 욕망의 구조를 분석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이 말을 논의의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고 있는데,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어떤 집단이 신에게 동물이나 인간과 같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풀고 신의 은총을 기원하는 의식이 아니라, 집단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속죄양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통해 집단의 질서와 일체감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이다.
따라서 파르마코스는 어떤 불확실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는 속죄양이 아니라, 집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언제든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폭력을 상징적인 폭력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떠맡은 희생물이다. 일종의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속죄양 제도를 통해 사회는 불순한 폭력(violence impur)을 응징하는 순수한 폭력(violence pur)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희생제의는 '해로운' 폭력과 '이로운' 폭력을 차별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폭력의 희생자인 속죄양에게 성스러운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게 되는데, 이 성스러움은 바로 '이로운' 폭력의 폭력성을 감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문학비평사전 - Pharmakos)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소설은 그 욕망을 무참히 짓밟는다. 읽는 내내 부조리함을 소거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축적되고 집약된 분노가 가해자를 향하지 않고 희생자를 더욱 무참히 짓밟으면서 발효된다. 그건 희생자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연민의 시선이 기괴하게 비틀린 까닭이다. 그로서 독자가 온전히 연민할 수 있도록 더욱 잔인하게 희생자를 비튼다. 그건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스스로에게 향하는 분노이기도 할 것이다.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방관자가 되는, 방관자가 되었기 때문에 속죄양으로 작동하게 되기에 일어나는 분노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 소설<익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시대에서 동떨어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떨어져 지내려 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는 거 아닐까 싶네" 익사 - 135p
시대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그런 이야기였다. 속죄양에게 죄를 떠넘기려다가 되려 스스로가 속죄양이 되어버리고 마는 사회의 비극을 가리키는 데도 적합한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는 타자를 계몽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을 두배 세배로 짓밟음으로서 독자가 그에게 연민을 가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연민하지만 그 연민을 역설적으로 발화함으로서 되려 그 인물의 편이 되어 그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든, 어떤 짓을 저질렀든, 저지른 것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으며 지금 소설가에 의해 발화되는 것과 반대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작은 실수가 재앙급의 잘못이 되는 일은 막고 싶다고.
"이제 가능한 한 월급이 표시하는 만큼의 일을 객관적 절차에 따라서만 할 것이고 사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다음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밀한 지향보다는 표면적 당위로 변질되어 부질없기만 했던 선언 - 누군가를 구제한다는 착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는 나의 모자람을 타인으로 인해 채워가는 행위라는 - 도 남몰래 코를 푼 휴지처럼 변기에 던질 것이다." 이물異物 192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지금까지 겪어온바 맘먹고 들이대는 사람에게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이 적지 않았다. 몸을 격렬하게 뒤치는 지렁이 앞에서는 구둣발도 어디를 밟아야 치명적일지 몰라서 잠깐은 멈칫한다. 그 뒤에 지렁이를 기다리는 운명이 압사뿐이라고 해도, 끝내 꿈틀하지 않으면 여기 아닌 다른 데로 가기란 요원하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어쩌면 거기 43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무엇보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하해와 같은 베풂과 나눔을 실천한들 바퀴나 엔진 소리로 미루어 이제 이 차도 오래가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나중 가면 피차 난처해질 뿐만 아니라, ...... 최악의 경우 시신을 둘러메고 다녀야 할지 모른다. 누군가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품속에 몰티즈 한 마리나 무사히 지켜내는 게 정신적으로 남는 장사이며, 이 순간의 외면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문득 차창 너머의 디귿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눈 속에 담긴 혐오 내지는 공포 아니면 간구의 빛을 포착 했다고 느꼈음에도 니은은 다만 불가능한 행운과 안녕을 비는것이 서로에게 최선이라 믿으며, 디귿의얼굴거의 절반이 녹아내리는 이 순간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동등해진다." 식우蝕雨 164-165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그건 그의 소설 '이창'에 나오는 주인공의 행동과도 대비되는 방식이다. '이창'의 인물은 현실을 바꾸려는 계몽적인 노력이 역반응을 일으켜서 희생자가 희생되는 형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화자의 노력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을까? 나는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희생당하게 되었다 해서 연민과 참견 자체를 나쁜 일로 매도해야 하나. 아니다. 연민의 방식을 좀 더 섬세하게 가꾸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할 뿐. 목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 것이다.
지독히도 현실적이기에 환상층위를 끌어와서 더 몽환적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는 더 차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에는 환상기법이 드러내는 선명한 현실만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주세요. 현실에 안주하지말고, 분노해주세요. 하지만 그 분노는 타인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되요.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기에, 그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서로를 돌보는 방법이 온전한 길이에요. 그리고 그런 연민과 돌봄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볼 수 있기를, 그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기를"
이 이야기를 여태 꼬아서 보았지만, 다시 정방향으로 보면 구병모의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으면 건강한 집단을 이끌어갈 수 없는 우리 사회를 겨냥한 소설적 파르마코스인지도 모른다. 그로서 현실이 더 이상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는 바람이 담긴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왜 파르마코스가 되어야 했나?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