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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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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그날의 역사로부터 아직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다.  매년 “5.18행사때 이 해는 518 몇 주년입니다.”라고 적힌 플랭카드가 도심에 걸렸다. 나는 해마다 달라지는 숫자를 지나쳤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왜 잊었을까. 나의 세대는 그 때의 상처가 아직 아물기 전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차츰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518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이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 책 읽는것을 미뤘다. 이 책을 읽지 않으면 그때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남의 일이 되어버린 일에 냉정하다 느꼈다. 그런 나를 보니 이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일을 만든 사람은, 이 일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지 않는 일이라 손쉽게 결정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권력이 그 사람을 미치게 하였던가. 인간의 본성 안에 폭력이 잠재되어 있어서, 어디든 분출할 구멍을 기다리고 있던가…


“맨 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승의 사채 같은 것이 되었어.”

소년이 온다 (검은 숨 48p)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소년이 온다. (검은 숨 52p)


5.18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삼일이 걸렸다. 끝까지 읽는 데 몇 번을 쉬면서 읽었다. 띄엄 띄엄 읽었기 때문에 한 호흡에 읽은 것보다 집중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읽으면서 군데군데 울었다. 이 일을 몸으로 겪은 사람은 울고 싶지 않아도 눈물이 나고, 울고 싶어도 울지 못헀을 지도 모른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소년이 온다 (어린새 45p)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비극은 없다. 비극은 난데없이 일어났다. 내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 기꺼이 맞서서 죽음을 선택헀을지, 아니면 살아남은 자에 속했을지 가늠하지 못한다.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내가 학살자로 거기 있었다면, 내 기억을 지우고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면, 떠올려야 할 기억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함께 묻혀 있다면, 그 시간이 나를 가리키는데도 나를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면 온전한 인간으로 설 수 있을까.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쉬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소년이 온다 (밤의 눈동자 167p)


내가 모든 일에 연민을 느끼며 살았더라면 삶을 하루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일같이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비극들이 일어난다. 책에서 언급된 용산참사는 내가 아는 참사중 518과 가장 유사하다. 용산에 투입된 사람의 감정과 지키는 사람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작전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책은 518의 심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가 빚어낸 비극에 인간으로서 그들은 각자 어떻게 대처했는지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집안 사정이 나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앳된 학생들의 스크럼 속으로 걸어들어갔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까지 그 속에서 버텼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 소년이 온다 (일곱개의 뺨 87 p)


개개의 도덕적 의식이 투철해서 행한 것이 아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집단 도덕의식이 그들을 행동으로 붙들었다. 인간의 고결함과 저열함이 맞섰지만 누구도 승리하지 않은 채 사상자만 내고 끝이 났다. 인간의 유리같은 빛나는 양심을 지키려고 행동한 사람도 행동하지 않은 사람도 나무랄 수 없는 기점에 소설이 서 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과 싸웁니다.”

소년이 온다(쇠와 피 135p)


삶에는 매일 새로운 과제들이 주어진다. 주저앉아 슬픔을 이어나가서는 안된다. 그 시간에 슬픔에서 빠져나와 해야 할 일을 기획해야 한다. 양심을 위해 죽은 유리같은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슬픔에 잠겨 누군가가 삶을 포기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살아라. 라고 말하면서 보내고서, 그때의 억울함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것이다. 

비극이 오는 것은 누군가의 손에 달린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비극이 오는 걸 방치할 수는 없다. 그들은 비극적인 상황앞에서 양심이라는 강렬한 무언가에 압도되어 비극을 민주화 운동으로 이끌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하며 손을 이어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들의 피로 얼룩진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생에 감사하고 또 다른 참사를 막으려 노력하는 걸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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