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체제의 기원 - 한국전쟁과 자유주의 평화기획
김학재 지음 / 후마니타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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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란 특정한 형태의 자유주의 기획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즉, 냉전이란 특정한 전쟁인 동시에 특정한 평화를 추구했던 기획이다. (122~123쪽)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인 ‘평화기획’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전반부에 각종 개념과 그 개념을 둘러싼 연구(이론)사를 서술한 부분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게 대체 한국전쟁에 대한 책이 맞나 싶었다. 신문 기사나 출판사의 리뷰를 참고하여 ‘새로운’ 책을 겨울방학 커리큘럼에 포함시켰던 것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책은 성공한 책이다. 더군다나 이 책이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감안하면 매우 성공적인 박사논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책임론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틀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았다는 것, 거기에다 꽤 탄탄한 이론의 정지 작업을 함께 진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 평화기획을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이라는 큰 틀 속에서 시기별로 구분을 시도한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연구의 핵심 주장은, 판문점 체제는 단지 냉전 대립과 군사적 전투의 산물이 아니라, 자유주의 기획이 반영된 국제법과 정치적 기획이 충돌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34쪽)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기존에 진행된 사실 관계에 관련된 연구들의 통설을 뒤집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전쟁의 '역사성'을 항상 염두에 뒀기 때문이 아닐까?


전 세곙에 걸쳐 적은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적이 아니라 인류의 적으로 선포되어 절멸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본격화된 총력전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된 '이념 전쟁'으로서, 단순히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국가와 국민을 괴멸시키고, 적을 섬멸하는 것을 정당화햇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 규모에서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도덕적인 전쟁은 없었다. 마치 중세 유럽의 종교전쟁이 전 세계로 확대된 것처럼, 전쟁 자체를 금지시킨다는 전 지구적 기획이 수립된 이후 전쟁은 오히려 전 지구적 규모의 선과 악의 대립이 되었고,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전쟁 개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동맹국들은 기본적으로, 공격을 먼저 시작한 추축국은 정상적인 교전 국가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이들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승자의 평화를 추구했다. (94쪽)


 그래서 이 책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고 쉽게 읽을 수 있다. ‘빠르고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박사논문’. 그 자체만으로 성공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 실제 위법 논란과 법학적 차원에서의 논란을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책의 중간마다 ‘위법성’ 등에 대해 서구의 법학자들이 당대에 논했던 내용을 정리해놓았다. 물론 이것은 국제법학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실제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문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당시의 정치적 논쟁으로 치환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구분이 모호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더군다나 해당 부분의 논쟁이 실제 UN이나 미국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헷갈린다.

소련을 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책임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냉전적 세계관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대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와 위협을 하나로 통합하는 서사를 제공했다. (137쪽)


2. ‘자유주의적 기획’이라는 정의 자체가 미국 중심의 분석이 아닌가? 책 전체를 읽다보면 냉전의 동력을 자유주의에서만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의 또 다른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소련과 중국은 미국의 전략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했는가?

3. UN이 개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칸트적 보편 기획’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 또한 정치적 정당성 마련을 위한 레토릭에 불과한 것 아닌가? 또 중국 개입 이후의 상황을 두고 필자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홉스적 질서”이며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은 ‘합의 없는 질서’의 산물”이라고 보았다.(357쪽) 하지만 앞서의 ‘칸트적 질서’에서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했는가? 어차피 그 당시에도 미국만의 자의적 해석이 많은 것을 주도하고 있던 것 아닌가?

이렇게 유엔으로 상징되는 칸트적 기획은 냉전 시기 홉스적 기획으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전쟁과 평화의 의미나 형태, 양상이 모두 변화했다. (179쪽)


이것이 미국의 국익에서 볼 때, 유엔 결의안이라는 초국적 제도가 갖는 기능적 효용이었다. 즉, 한국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유엔으로 대표되는 칸트적 법치 기획은 미국의 홉스적 냉전 기획의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273쪽)


4. 레토릭으로서의 칸트적 법치 기획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홉스적 기획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칸트적 법치 기획과 홉스적 기획이 이항대립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 시기에 우리가 결국 목도한 것은, '합리적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고도의 자유주의적 이상이, 정치적 신념에 대한 배신을 우대하는 차별적 보상 시스템, 그리고 정치 체제에 대한 충성을 가장 호전적으로 증명해야만 난민적 지위를 부여하는 망명 시스템으로 대체된 과정인 것이다. (445쪽)


5.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보는 이런 관점이 기존의 ‘수정주의적’ 관점의 결론과 얼마나 차별성을 지니는가? 필자가 기존 연구의 한계라고 지적했던 것과는 달리, 이 책 또한 결국엔 미국의 의지와 전략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한국전쟁을 새로운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흥미로운 책임에는 틀림 없다. 현재의 갈등 상황에 대한 반성과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비전을 제시한 것은 기존 연구에서 보기 힘든 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문제의식은 진정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만 할 점이다. 우리는 왜 한국전쟁을 발전적으로 소비하지 못하는가?


한국 사회는 왜 정전 60년, 분단 70년이 지나도록 한국전쟁과 분단으로부터 폭력과 파괴, 단절과 갈등에 대한 깊이 있고 호소력 있는 성찰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한국전쟁은 왜 평화에 대한 지혜의 보고가 되지 못하고, 갈등과 냉전의 박물관으로 남아 있을까? 한국 사회가 그동안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평화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국제 평화에 기여하지 못한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52쪽)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평화에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561쪽)


우리에게 이 새로운 "이상이 숭고한 이유는 그것이 초월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넓은 관점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563쪽)


보통 '강박'하면 나쁜 것을 지칭하지만, 지금 나에겐 '새로운 관점'에 대한 강박이 필요한 것 같다. 그걸 위해선 역시 공부 밖에 답이 없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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