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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번역하면, 개인적으로 3개 정도의 경험이 생각난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한 번은 산림청 관련, 또 한 번은 중국 쪽 관광지 개발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번역한 적이 있다.
둘 다 초벌 번역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부담이 덜하기는 했는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인지라 꽤나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 미천한 영어실력 때문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또 한 번은 모 출판사에서 출간될 책을 교정을 본 거였는데, 필자가 재중교포인 까닭에 책을 거의 다시 쓰는 정도의 교정을 봤었다.
물론 마지막 것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그야말로 '번역'해야만 했기에 생각이 나는 것이다.
(몇몇 문장은 정말 일하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_-... 지금 생각할 때 참 어이 없는 것은 내가 받아든 원고가 초고가 아니라 책의 형식으로 인쇄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출판사의 편집자는 뭐하는 사람일까? --;;)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뉘앙스를 가지고 있겠으나, 이 말은 대부분 '원전'을 강조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역설한다.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며, 반역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번역이 왕성해야 우리말도 풍부해지고, 우리말이 풍부해져야 세상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으로 육화되는 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적 역량은 향상되고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수준인 우리 번역문화를 진단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좀 오버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 학계의 문제,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자꾸만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읽어나갈 수록,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게 될 수록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가의 수입 대리석이나 외제 욕조, 세면기, 홈시어터 따위로 집안에 '돈'을 바르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책으로 집안 장식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읽지도 않는 책을 꽂아놓기만 하는 건 위선 아니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선도 그립다'고 한 김교신의 말을 떠올린다. 김교신은 성경에서 위선자의 표본으로 꼽히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비록 자신들이 선을 행하지는 못 할지라도 선을 마땅히 행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고, 그 선에서 어그러지는 일을 두렵게 여길 줄은 알았는데 반해, 20세기의 현대인은 '위선을 꺼린 나머지' 공공연하게 불의를 말하고 비례非禮를 행하면 도리어 솔직하고 철저하다는 사회적 칭찬을 받는다고 지적하면서, "오호라, 이제는 위선도 그리운 세대로다"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정부 차원의 번역 지원은 1999년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전부이다. 2002, 2003, 2004년에는 예산이 15억 원씩 책정되다가 2005년에는 2억이 늘어 17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선저된 과제수는 각각 42건(2002년), 52건(2003년), 52건(2004년)이었다. 2002년부터 3년간 146개 과제가 선정되었으니 해마다 평균 50개 과제 정도가 예산을 지원받는 셈이다. 여기에는 서양 고전 뿐만 아니라 동양 고전까지 포함되어 있다.
4천 5백만 국민을 위한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투입되는 정부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번역서를 읽다보면, 정말 짜증나는 일이 있다. 분명 한글로 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거다.
그 긴 문장에 주어는 없고, 조사는 멋대로 쓰이고, 접속사는 문맥을 부숴버린다.
원문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 거의 100%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거다. 요새 읽고 있는 책의 한 문장을 보자.
노엄 촘스키는 공공연한 반란의 동기들 중에서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에 대한 거부를 올바르게 지적한다.
한 번만 읽고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난 문장력이 떨어져서 이 문장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읽고도 원 저자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노엄 촘스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사실 이 표현도 어색하기 그지 없다)이 ~에 대한 거부라? 뭐.. 이건 그렇다 치자.
(공공연한 반란... 도 일단 그냥 넘어가자.)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 이 문장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한 것 ->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 인가, 아니면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 ->의 편을 드는 것 인가?
(뒤에 이어지는 '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카오스다. -_-)
이렇게 되면 노엄 촘스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원전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원문의 문장 구조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번역'이라면 한글을 읽는 독자들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건 문학작품의 번역도 아니지 않은가.
번역이 정말 어려운 일인 반면에,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턱없이 부족한 일인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책을 산 독자의 입장에서는, 울컥하는 짜증을 가라앉히며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의무까진 없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직접 번역을 하고 있는 번역가의 입장에서, 그리고 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의 입장에서,
또 인터넷 서점의 회원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리스트에 담긴 책을 구매하는 애서가의 입장에서. (아.. 동료애가 느껴진다. ㅎㅎ)
이 책은 읽기 쉽고 깔끔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책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번역에 대한 문제를 종종 느꼈다면. 분명 읽어볼만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