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무일푼으로 시작하셨던 부모님의 상황상 여유 있는 가정도 아니었다. 때문에 외식이란 것은 정말 연례행사였다. 성적표가 나오거나 기타 특별한 일이 있어 외식을 하게 되어 갔던 곳 중에 ‘맘모스’라는 경양식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을 처음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경양식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식당은 재래시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허름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가면 넓직한 공간 가운데에 분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하얀 천이 덮인 테이블이 20개 정도 놓여있었다. 샹들리에나 테이블이나 의자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촌스러웠고 분수 또한 제대로 물을 뿜어내는 날이 드물었던 그곳은, 내겐 가슴 설레는 곳이었고 한 편으로는 긴장되는 곳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본 적이 없던 내 머릿속에는, 돈까스를 주문한 뒤 나오는 스프를 받아들던 순간까지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만이 떠돌고 있었다. 외식장소로 숯불고기집이 낙찰되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경양식 식당’만의 아우라가 내 주변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 사실 왼손잡이였던 나는 당연히 왼손으로 나이프를 들고 돈까스를 썰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매너’를 지켜 오른손으로 힘들게 나이프를 사용했고, 스프를 먹을 때는 숟가락을 몸 쪽으로 쓸어 ‘불편하게’ 먹어야했다. 또 단무지보다 맛없던 마카로니를 입에 넣을 때에 그 맛과는 별개로 무언가 ‘불편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다. 이 모든 것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같이 갔던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먹는 법에 대해 간단히 가르쳐주기는 하였지만, 사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이 친절히 가르쳐준 대로 행동하는 착한 어린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맘모스’에만 들어가면 자발적으로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왼손에 나이프를 들게 되면 누가 그것을 보기라도 한 듯 부끄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렇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맘모스’의 추억을, 베블런은 100년도 더 전에 집요하게 분석했다.

 

즉 훌륭한 예절을 갖추는 데는 그만큼 많은 시간, 열성, 비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빼앗기는 사람들이라면 예절을 습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세련된 취미, 예절, 생활습관은 상류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용한 증거이다. 훌륭한 예절에 관한 지식은 상류층 사람들이 일반인들의 시선에 띄지 않게 숨긴 생활의 일부를 아무런 돈벌이도 안 되는 성과물들을 획득하기 위한 가치 있는 활동에 소비했다는 자명한 증거이다.

 

  계급이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나는 내가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자의적 판단 하에 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시절 그 식당을 처음 가는 이와 함께 했다면 나는 두려움을 의기양양함으로 가장했으리라. 그렇다면 나의 몸부림과 두려움, 의기양양함은 무엇에 기반한 것일까? 그렇다. 바로 경제적 계급이다. 그리고 그 계급에 기반한 나의 감정들은, 까딱하면 노동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들의 아이들은 그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없음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노동에 대한 과시적인 불참은 우월한 금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관습적 표현이 되고 또 명성을 획득할 만하다는 관습적 지표가 되기에 이른다. 그와는 반대로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가난과 예속의 징표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금력과시경쟁은 생산이나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획일적으로 조장하는 한편으로 생산노동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 수치심을 안겨준다. 초기 단계의 문화를 물려받은 고대의 전통 하에서는 그처럼 비천하게 평가되지 않았던 노동이 이제 불가피하게 가난을 증명하는 수치스러운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단순한 ‘가난함’을 넘어선 인간적인 차별을 내포한 것이었고,

 

우리의 사고습관에는 비천한 고용살이를 연상케 하는 직업들에 특별히 결부되는 의례적 불결함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직무를 관습적으로 요구받는 피고용인들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상류층 취향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이다.

 

“따라서 차별적 비교는 결국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과 다름없”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끼니를 굶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끼고 아끼던 부모님 덕에 부모님의 가난을 직접 겪지 않고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내 기억의 언저리에 작은 상처처럼 남아있는 ‘빈부차’는 어디에서 생겼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 무렵의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들은, 바로 옆집에 있던 비디오, 재믹스, 현미경, 피아노….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교육 수준이 높았던 옆집 아주머니의 말투, 옷차림. 그 ‘고상함’은, 아무도 종교생활을 하지 않던 우리 집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 모두가 아침 일찍 성당으로 가곤 했던 옆집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베블런이 지적했듯이 심지어 종교까지, 내게는 ‘소비재’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소비재는 우리 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왜?

 

다른 한편으로 오로지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의 구성원이나 계급들을 살펴보아도 생존이나 육체적 안락이라는 동기는 결코 그처럼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는다. 소유권은 최저한도의 생존조건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탄생하여 인간의 제도로 성장했다. 지배적인 동기는 처음부터 부에 대한 시샘과 선망을 낳는 명예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후 발달한 어떤 단계의 문화에서도 일시적이고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만한 지배력을 발휘한 다른 동기는 결코 없었다.

 

  때문에 나의 ‘가난’은 분명 존재할 ‘절대적 가난’에 의해 상쇄되지 못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윤리’와 종교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기 몇 년 전에, 베블런이 지적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즉 ‘차별적 비교’를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그리고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이 증명하듯이) 그 비교의 화살표는 항상 위로 향해있다.

 

그래서 사회적인 기준에 비추어 자기보다 월등한 계급이나 그 바로 아래 계급과 자기를 비교하는 계급은 거의 없는 반면, 바로 자기보다 바로 한 단계 위의 계급을 시샘하고 따라잡기 위해 경쟁하는 계급은 어디서나 같은 비율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강남에 아파트를 살 확률은 거의 없으면서도 강남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것에 대한 분노는 여전하다. 마치 자신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 가격이 올라 그러지 못했다는 냥.  이러한 분노는 개혁과 변혁을 위한 에너지로 치환되지 못한다. 자신들의 ‘생존수단’이 박탈됨으로 인해 거꾸로 보수화되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체의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존투쟁에 쏟아 부어야 하는 절대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명제로부터 ‘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베블런의 날카로운 인식은, 마르크스와 비교하면 굉장히 비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을 예고했지만 베블런은 보수화를 예견했던 것이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혁명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억제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간”으로 알려진 인간형이 정상적이고 결정적인 인간성의 전형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라는 베블런의 예견은, 100년 후의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또 생산력이 극대화된 오늘날에도 극단의 현상들이 출현하는 이유를 ‘과시적 소비경쟁’을 통해 명확히 설명하고, 수요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수요를 결정한다는 혁명적인 인식 또한 굉장히 놀라운 측면이다(현대의 소비재를 보라. 베블런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명품.... 유행....).

 

개인적 장신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주요목적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것을 착용함(소유함)으로써 명성을 획득하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물건의 심미적인 유용성은 그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크게 높아지지도 않고 보편적으로 향상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반화해보면, 어떤 물건이 우리의 미적 감각을 자극할 만큼 가치를 획득하려면 아름다워야 함과 동시에 비싸야 한다. …… 비싸다는 표시는 비싼 물건이 아름다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습관적으로 비싼 물건을 찾게 되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습관적으로 동일시할수록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되지 않기에 이른다.

 

생산력 증가 덕분에 좀더 적은 노동으로도 생활수단들을 조달할 수 있게 된 사회의 생산담당자들은 생산속도를 좀더 늦추기 위한 방안보다는 과시적 소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데 정력을 쏟게 된다. 그에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고 생산의 긴장도 완화되었지만, 그것이 과시적 소비경쟁을 줄이지도 못하고, 증산된 생산물들도 과시적 소비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전용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표현은 베블런의 의도가 단순히 냉소적 비판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한계급의 특징적인 태도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格率)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제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자연선택의 법칙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 그런 낡은 생활양식[반동]은 좀더 가까운 과거로부터 계승되고 공인된 낡은 생활양식보다도 당장 절박한 생활환경에 대한 적응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100년 전에 한 젊은 학자가 써내려간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이 책이 보여주는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독자 입장에서 이 ‘고전’을 무비판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베블런이 말하는 ‘산업사회’나 ‘공동체’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는 산업사회나 공동체에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태도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베블런은 개인이 추구하는 ‘경쟁’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배치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엔 ‘경쟁’이 공동체에도 기여한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부분은 폐기될 수밖에 없는 이론이 아닌가?


  둘째, ‘금전거래가 일상화되고 기계화될수록 기업총수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고 ‘기업총수를 “영혼 없는” 주식회사로 대체하는 경향’, 그리고 ‘유한계급이 담당하는 중대한 기능인 소유(권)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베블런의 장기적 예측은 자본주의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예언인가, 아니면 자본이 지배하는 종말의 한 장면인가?


  셋째, 계급에 대한 정의. 부를 축적한 ‘유한계급’은, 그렇다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가? 유한계급은 세습되는가? 아니면 유전되는가?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유전’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이 책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는 것 같다. ‘격세유전’은 유전이 아니라 오히려 돌연변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경제적인 조건으로만 계급을 살펴보는 것은 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되지만, 그 계급이 형성된 배경이나 원인을 조명하기는 힘들다.


  넷째, 베블런이 말하는 ‘생산’을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가? 그는 직접적으로 재화를 생산하는 행위만을 ‘생산’으로 보고 있다. 만약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산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다면, 베블런의 핵심개념인 ‘과시적 소비’, ‘대리 여가활동’ 또한 심각한 개념적 위기를 맞을 것이다. 만약 한 남자 배우가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생산은 아니더라도 ‘일’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소비나 여가라고 할 수 없는 행위다. 그리고 재화가 아닌 ‘자본’을 ‘생산’하는 행위는 또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인용 각주도 붙어 있지 않은 이 ‘문화비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등학문의 예속을 이야기하는 이 책의 말미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통찰’이 바로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고전이 2005년에야 제대로 번역이 되었고, 그나마 1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되어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또 다른 비극이다.

 

  솔직히 읽기가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니다. 400페이지의 책이 800페이지처럼 느껴지는, 오랜만의 체험을 했다. 어떤 부분은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인데, 그럼에도 이 책은 분명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요상한(?) 출판사에서 고전의 부분만을 발췌해서 책을 마구 찍어내고 있는 모양인데(이게 도서관에도 들어와 있더라), 그런 식으로 고전을 읽는 것보다는 조금은 힘들더라도 전체를 읽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액기스'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타인이 만들어준 액기스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400페이지 내내 야지를 놓는 그 매력을 더 좋은 번역이 뒷받침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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