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토마스 핀천의 글이 처음 번역된 것은 아니지만 이 작가의 글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핀천의 초기작품들을 모아놓은 작품인데다 1편을 빼고는 전부 대학 시절 썼던 작품이라는 단편들은 아주 편하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소설들만을 읽는데 조금 재미가 없다고 생각 되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이 작가의 소설이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책의 앞에 붙어 있는, 약 단편소설 한 편 정도 분량의 작가서문은 다른 책들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작가 서문을 보면 작가가 그 당시 어떤 소설을 쓸 때의 상황과 그 글을 쓰게 된 배경 같은 것들이, 또 작가가 그 작품에 대해 스스로 미흡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스스로 서술하고 있다. 이 작가 서문이 모두에게 좋고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반대로 모두에게 좋지 않고 필요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독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핀천의 작품에 조금이나마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구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로지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이 서문이 빼앗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두 경우다 아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작가 서문을 조금 읽다가 소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은 작가 서문을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고 이것을 작가인 핀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핀천은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두고 ‘나는 중년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였다. 실제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인물들은 어리고(실제 물리적인 나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성숙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인물들이 작가의 젊은 시절의 모습들이 어느 정도나마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인물들에게 더 애착이 갔던 것 같다. 그들의 모습이 아직 삶에 서툴고 삶을 알 수 없는 내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소설을 읽으면 이 작가가 이 소설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알아차리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저 문장에서 문장으로 느리게 넘어 가다 보면 그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렇게 읽어 내려가는 문장들이 쌓여 가면서 그 사이 사이에서 풍겨지는 느낌이나 분위기들은 하나로 크게 이어져 소설 전체를 감싸게 된다. 그러면서 이슬비가 서서히 몸을 적시듯, 그의 문장들은 그 문장들이 풍기는 분위기들은 읽는 독자를 서서히, 느리게 적셔나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잘 느껴보면서 그 사이에서 최대한 흠뻑 자신을 적셔 가면서 읽어 내려가기를 권해 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소설들이 정확히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예를 들어「이슬비」에서 주인공이 불현듯 사람들을 따라가 시체들을 건져내는 장면 같은 곳에서 어떤 강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 이미지가 여러 가지들을 불러 낼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 책의 단편들을 보면 인물들이 지내는 장소가 꽤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 장소에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이슬비」에서의 군대나「로우랜드」에서의 쓰레기 폐기장,「엔트로피」에서의 번갈아 보여 지는 아파트 등이 그렇다. 작품들을 읽다 보면 어느 소설에서나 그렇듯 이 장소들은 이 인물들이 물리적으로 거하는 공간인 동시에 어떤 심리적인 공간, 혹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움직이고 생활하는 인물들은 그곳에서 어떤 안정된 상태를 취하고 있다기 보다는 계속 뭔가 껄끄럽고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작가가 이것을 그의 문체로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려는 것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려는 것을 최대한 문장으로 받쳐주는 것 같은 그의 문장 혹은 문체가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은 후 번역된 핀천의 장편도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그 책보다는 처음 핀천을 만나게 된, 핀천 본인이 초기에 쓴 이 책이 내게는 더욱더 오래 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