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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어떤 농담 같은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조잡한 농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때론 농담이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찌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도 있다. 농담인 듯 농담이 아니듯, 누군가에게는 웃어 넘길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웃어넘길 수 없는 것.
삶도 그렇지 않을까? 팬터마임이나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상황도 있을 것이고 살짝 찌푸린 채 먼 곳에 뜬 달을 바라보는 삶도 있을 것이다. 농담과 농담이 아닌 상황 사이에서 삶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 그것은 어찌 보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어찌 보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모순과 역설의 반복적인 쳇바퀴인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 나는 그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때로는 서늘하고 또 때로는 진실한 삶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얼마나 유명한 작품인지, 나는 이미 밀란 쿤데라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 그림을 표지로 했다는 밀란 쿤데라 전집도 오직 한 권만 소장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이번에 <무의미의 축제>가 발간되었을 때, 나는 이 작가와 만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그리고 만났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150페이지도 되지 않는 중단편 분량의 글을 나는 하루만에 다 읽어내려가고야 말았다.
정말 농담 같은 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벼이 읽힌다는 면에서, 우스꽝스러운 유며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어떤 희극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아래 깔린 무서운 진실을 나도 모르게 외면하게 된 건 아닌가 두려움이 들었다. 칼리닌그리드에 대한 유래를 들려주는 대목에선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를 들려주는데 그 부분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대목이었다. 라몽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 말은 아직도 잊히질 않고 있다.
알랭, 나는 죽은 다음에도 십 년마다 다시 깨어난 칼리닌그라드가 여전히 칼리닌그라드로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래야만 나는 인류에 대해 약간의 연대감을 느끼고 관계를 회복해서 다시 내 무덤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_44p
별 거 아닌 이야기 같지만 가만히 이 일화를 들여다 보면 인간의 어떤 성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 같다. 방광이 약해 계속해서 화장실을 가야만 했던 칼리닌의 희극적인 요소엔 어떤 비극이 깔려 있을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서,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준 일화는 아니었는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희극적인 배경 아래 깔린 진실은, 어떤 인간적인 것을 탐구하게끔 하였다.
사실 이 작품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랭이 배꼽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그 배꼽은 알랭의 탄생에까지 다가가게 되었다. 샤를이 스탈린의 일화에 고집하게 되면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칼리방이 우스꽝스러운 파키스탄어를 창조하여 사용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인간 그대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나 싶다. 알랭, 샤를, 칼리방, 라몽이 들려주는 각각의 이야기는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았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다. 무의미한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라몽이 다르델로에게 해준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라는 것, 하찮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을 떼어놀 수 없다는 말. 삶은 모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시시하고 하찮고 별 볼 리 없지만,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 무의미한 것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게 될 적엔, 사실은 무의마한 것이 아닌 우리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라몽은,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라고 말해주었다. 사랑하라고. 마치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삶은 없듯. 알랭이 마지막에 어머니와 화해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단순히 어떤 사람들의 사소한 일화를 담은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의 모든 인생을 담은 글이었다.
삶이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에 도달해있을지도 모른다. 별 볼 일 없는 것을 사랑하다보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랑하자. 우리의 무의미를. 그것이 축제가 되는 날까지.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_14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