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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기억 속으로 매드 픽션 클럽
엘리자베스 헤인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선정적이지만 그렇게 야하지는 않다. 고작 시리즈의 1부만 읽었을 뿐인 내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는 소설이나 인터넷에 *.txt 파일로 떠돌아다니는 저자 모를 저작물들을 몇 편만 들춰본다면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애칭을 달고 다니는 그레이씨가 달리 보이리라. 뭐 그렇다. 나는 일전에 그레이씨를 만나고 그를 내게 강력 추천한 인터넷서점 MD에게 도전적인 투정을 남긴 적이 있다. 사실 내가 그레이씨를 읽고 기함했던 이유는 노골적인 성애묘사가 때문이 아니었다. 별로 그렇게 순진한 처자도 아니고,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기에 SM이니 본디지니 채찍이니 하는 것들도 뭐 그런 것도 있겠거니 했다.

 

 

내가 기함했던 진짜 이유는, 그레이씨가 대단한 통제광이고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예쁘고 똑똑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돈 많고 젊고 유능하며 잘생기기까지 한 통제광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느낀다. 뉴욕대의 교수라는 사람은 이 책이 남성과의 경쟁체제에 지친 현대 유능한 여성들의 복종판타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평론했다. 소설가 백영옥씨 역시 강한 남성에게 보호받고 지배당하고 싶은 여성의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책이라는 서평을 남겼다. 그레이씨의 광고문구 또한 어찌나 멋진지, “알파걸들을 위한 로맨틱 힐링코드”란다. 남자들과의 경쟁에 떡이되서 내심 강한 남자에게 지배당하고 복종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알파걸들은 그레이씨 같은 통제광과의 로맨스를 꿈꾸며 이 책으로 스스로를 치유했을까? 모를 일이다. 일단 나는 알파걸이 아닌 고로 알 수가 없다.

 

 

‘복종 판타지’라는 것은 누구의 판타지일까? 여성의? 남성의? 강한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이라는 성 관념의 역사는 검치 호랑이 빤스를 입고 돌도끼를 휘두르며 매머드를 사냥하러 돌아다니던 시절부터 전설처럼 전해져온 것이니 그 뿌리가 참으로 깊은 것이다. 어쩌면 생물학적으로도 일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 사이에 ‘복종’과 ‘지배’라는 야시꾸리한 단어가 끼어들게 된 것도 그렇게 역사가 깊을까? 애초에 ‘복종 판타지’라는 말의 출처는 어느 시절의 누구의 입(혹은 손)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역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 광고 문구는 사실 정말로 멋지고 세련됐지만 불편한 것이었다. 그런 평론은 너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해서는 서평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그 책에 대한 일부 평론과 자극적인 광고문구가 조금(많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나 책에 대해서는 정말 어떤 코멘트를 남길 거리가 없더라.(별로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가진 서역 출판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들은 흥미롭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이 선정성을 놓고 보자면 이보다 더한 책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소설을 읽다보니 그레이씨가 떠올라 버렸다. 두 책은 은근하게 닮은꼴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멋진 남자 그레이씨가 있다면 『어두운 기억 속으로』에는 파란 눈이 매력적인 미남 리 브라이트만이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 아나스타샤 스틸과 캐서린 베일리는 당차고 도전적인 성격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레이와 리, 두 남자 모두 재력도 있고 몸매가 끝내주며 결정적으로 잘생겼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라도 매혹시킬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양을 지닌 강한 남성이다. 그레이씨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에게 비싼 컴퓨터와 좋은 차(tea가 아니라 car다)를 선뜻 선물할 정도로(그런 일은 그냥 껌이다) 말도 안 되는 재력을 가졌다. 리는 그레이씨만큼 돈이 넘처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레이보다도 매력적인 남자다. 거의 모든 일에 능숙하고 항상 자신감에 차 있는 이 남자는 조금 위험한 매력이 있다. 알 듯 모를 듯한 무언가가 있는, 베일에 쌓여있는 의문의 남자! 라고 표현하면 딱 적절할 듯하다. 두 남자 모두 사랑하는 여자에게 헌신적이며 육체적인 애정표현에 심히 적극적이다.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아나스타샤 스틸과 캐서린 베일리 또한 비슷한 구석이 많다.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던 간에 어디서든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아무리 잘난 애인이라도 본인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소신 있게 행동한다. 남모를 상처를 갖고 있는 것 같이 구는 애인을 잘 보듬을 줄도 안다. 하지만,

 

 

두 책의 주인공들 사이에 공통점은 딱 거기까지다. 놀랍도록 비슷한 설정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정 반대로 간다. 한쪽은 다시없을 로맨스가 달달하게 이어지는데 한쪽은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종국에 가서는 호러로 장르를 갈아타며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레이씨에서는 남녀 간의 지배와 복종관계가 사랑의 한 면모로 그려지며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반면, 『어두운 기억 속으로』에서는 그것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최악의 결말로 전개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구속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을 요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일상의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려 하고 그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를 정당화 하려 한다면 그것은 과연 로맨틱한 일일지, 여자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에 대해 두 책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레이씨는 여성과 남성간의 연애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잘생긴 그레이씨의 황홀한 양복맵시와 고압적이지만 정중한 말투에 가려져 ‘로맨틱함’으로 포장되고 있을지언정, 여자에게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태도를 강요하고 결국 여자가 그것을 ‘사랑’이라는 보기 좋은 명분으로 받아들이는 형태이다. 『어두운 기억 속으로』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그레이씨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무엇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다정한 애인이 자기를 지나치게 통제하고 간섭하려 들기 시작할 때,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에 대해서 여자가 느끼는 불편함과 거부감, 부당함을 이야기한다. 남자의 행동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이후 급속도로 악화일로를 걷는 ‘지배와 복종’의 연애관계에 대해서, 그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통제광과의 로맨스에 대해서 로망을 가지는 이가 말이다. 물론 그에 대해 나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복종 판타지’라는 것은 분명 허상이다.(피학적인 성애 성향은 실재한다. 하지만 이건 분명 복종 판타지와는 다른 것이며 일반적이지도 않다.) 그 야릇한 단어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두운 기억 속으로』인 것이다. 그레이를 읽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그레이 시리즈에 대한 일부의 평론을 읽고 혹시나 굴욕감을 느꼈거나 비슷한 유의 마음의 상처를 받은 여성이 있다면 오히려 이 책이 힐링북이 되어 줄 수 있겠다.

 

 

 

 

 

 

.....는 뭐. 복종 판타지라는 말에 울컥 했다가, 책에 리의 대사 중에 “여자는 거친 걸 좋아하잖아.” 대사 읽고 폭발. 그레이씨 얘기를 끌어와 버렸는데, 이 책이 궁금해서 서평을 찾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부분만 읽으시라. 일단 가독성이 좋고 표현 수위가 조금 높다. ‘좆같은 ―’을 정말 그대로 ‘좇같은 ―’이라고 적는 패기 있는 번역이다.(비속어 오타도 오타일까? 웃음.)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호러로 장르가 널뛰는데 그런 면이 더욱 책에 집중하게 만들더라. ‘사건’이 벌어지기 4년 전 과거의 일기와 사건 이후의 현재의 일기가 하루하루 교차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과거의 사건의 실마리가 일기 속에 조금씩 던져지는 형식이라서 정말 빠져들어 읽었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간의 관계가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상이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를 외치며 끊지 않고 술술 읽게 된다.

 

나쁜 놈으로 나오는 인물도, 구세주로 나오는 인물도 하나같이 매력적이라 여성 독자라면 더욱 신이 나게 읽을 수 있겠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심리치료를 받는 부분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작가가 심리학쪽 공부를 한 사람이겠거니 했더니 경찰 정보부에서 일을 했단다. 저자 소개를 보고나니 이야기의 리얼리티가 100을 기준으로 40에서 80으로 급상승. 소름 돋게 생생해 졌다. 자못 뻔해 보이는 줄거리지만 마지막에 중간 중간이랑 엔딩 이후에 반전도 있고 나름 훌륭했다. 재미는 별 4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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