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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위선(僞善)이라고 쓴다. 작위적으로 선함을 가장한다는 말이다. 위선을 하는데 에는 대게에 어떤 ‘의도’가 있게 마련이다. 선함을 가장해서 상대방의 환심을 산다든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든지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조금 애매모호하다. 선하다는 말의 의미가 해석하기에 따라 엄청나게 광범위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선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것인가? 상대방에게 너그럽다는 것인가? 착하다는 것일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일까? 착하다거나 좋다는 의미라면 , 그 ‘착하고, 좋은’ 것이 어떤 집단에 대한 것일까? 만물? 인류?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범위를 조금 좁혀보자 지인? 가족? 아무렴 어떤가. 이 말의 의미는 너무 유동적인지라 그 범위를 상정한다는 것은 조금 골치 아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헤르만 코흐의 소설 <디너>는 ‘위선’ 이라는 말을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 <디너>를 더욱 골치 아프게 읽어보자. <디너>에서 위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왜 그렇게 머리 아픈 구분에 목을 매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참 쓸 데 없겠지 싶으면서도, 나는 결론을 내고 싶었다. 가려내고 싶은 것이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누가 선을 가장해서 그럴듯하게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있는지 말이다.

 

 

무슨 그런 얘길 석 달 전에 예약안하면 곤란한 레스토랑에서 하니?

 

파울과 끌레르는 형님 내외와 저녁 식사를 앞두고 있다. 석 달 전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는 레스토랑이지만, 파울의 형님 세르게는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는 거물인지라 인기 레스토랑에 급하게 자리를 만드는 일을 스포츠처럼 즐기는 인물이다. 파울은 그런 형님과의 디너가 불편하다. 레스토랑 스텝의 인사를 받으며 거들먹거리며 입장할 형님이 눈꼴 시린 것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오늘 디너에서 파울은 세르게와 긴히 나눌 말이 있다. 아내는 몰랐으면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도 없어서 형제간의 가족모임을 청했던 것이다.

 

파울과 끌레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미헬. 어렵게 얻고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외아들이다. 형님 세르게 내외에게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두 아들 이라고는 하지만 한 아이는 친아들, 한 아이는 입양을 했다. 릭과 베아우라고 한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베아우가 흑인이라는 점이다. 베아우는 세르게 내외가 빈국에 대한 원조활동으로 알게 된 아이로, 베아우를 입양한 것은 정치인 세르게의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파울은 생각한다. 끌레르는 그런 파울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지적하지만.

 

어쨌든, 파울과 세르게 내외에게 미헬과 릭은 소중한 아들이다. 그런데 이 아들놈들이 엄청난 사고를 쳤다. 노숙자를 구타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 것도 모자라 불까지 질렀다. 그런 엄청난 일이 <사건파일 XY>라는 프로그램에 대대적으로 방송되기 까지 했다. 물론 방송된 화면은 CCTV영상으로 그 누구도 노숙자 살인사건의 범인이 미헬과 릭이라는 사실을 알 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는 역시 다른지라 그 방송으로 보고 그 잔악무도한 범죄의 범인들이 자신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파울과 세르게는 오늘 이 문제에 대해 결판을 지으려고 한다. 이 잔혹한 죄를 지은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그날 그 ‘부모들’의 디너

 

아페리티프를 마시고 애피타이저로 식욕을 돋운 다음 메인요리를 먹고 디저트로 마무리, 다음에는 더부룩한 속을 소화제를 해결하고 만찬을 제공한 레스토랑에 팁을 남긴다. 아들들의 곤란한 문제를 의논하는 부모님들의 저녁모임은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따라 시작은 유쾌하게, 과정은 스릴 넘치게, 때로는 무섭게 이어진다. 그들은 교사이고, 유명 정치인 이지만 그다지 인격적으로 완벽한 인간들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파울은 독선적이고 그의 아내 끌레르는 이기적인 헛똑똑이이며 세르게는 속물이고 그의 아내 베르테도 남편못지 않다. 그들의 진면목은 식사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의 아들들은 살인을 저질렀다. 그 노숙자는 힘없는 여성이었고 피폐해져 있었으며 더럽고 냄새가 났다. 아들들은 그녀를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아니, 그녀가 노숙인 이었다는 자체가 이유가 됐을까나? 열다섯 살 아이들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잔혹하고 무참한 범죄였다. 세상은 아이들의 범죄에 공분하고 있다. 아이들은 죄를 저질렀고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선’이다. 그런 명분을 세르게는 갖고 있었다. 세르게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줄도 놓아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 세상은 그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지만 세르게는 그것을 알리고 아들에게 죗값을 물게 할 생각이다. 타당한 이야기 이다.(물론 그의 생각은 순수하게 세상의 선을 쫓고 있지만은 않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대단한 속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르게의 정치생명은 끝이 나고 아들은 감옥에 갈 것이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더불어 그의 아우네 집까지 말이다. 그의 결심은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아우네 가정마저 흔들고 말 것이다. 이것은 과연 ‘선’ 일까?

 

세르게의 결심에 끌레르와 베르테는 반발한다. 끌레르는 그런 일로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들 미헬과 남편 파울이 있어 행복하다. 그들이 있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세르게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행복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베르테에게도 남편의 선언은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 뻔 한 이야기다. 남편을 수상으로 만드는 일이 바로 목전에 있다. 그 일을 망칠 수는 없다. 물론 아들의 인생도 망칠 수는 없다. 끌레르와 베르테, 그리고 파울까지 그들은 세르게를 막는데 의기투합한다. 그것이 그들의 ‘선’이다. 물론 그들의 ‘선’이 세상의 ‘선’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모르는 죄를 부러 나서서 밝혀 그들의 행복을 부숴대는 것 또한 ‘선’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에게도 명분은 있다. 그 명분은 아들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사랑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극적인 타협(?)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릭과 미헬 그 누구도 희생되지 않고 이 난관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희생양을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선’이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해해 줄 수도 있는 그들의 ‘선’. 그들의 문제는 짐짓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미헬은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파울과 끌레르도 파울을 사랑한다. 그걸로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이다.

 

파울과 끌레르, 세르게와 베르테가 내세우는 ‘선’들 가운데 가짜가 있다. 그것은 잘못되었고 위장되었으며 이기적이고 위험하다. 가짜는 무엇일까? 위장된 선은 누구의 ‘선’이었을까? 그 가짜는 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 위의 네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위선자가 될 수 있다. 참으로 골치 아프고 속이 쓰라리지만 이다지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답을 내린 것처럼 끝을 맺고 있지만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읽히면 읽힐수록 계속 확장되어가며 의문과 의심만의 꼬리를 길게 남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꼬리잡기에 뛰어들어 보길 권한다. 즐거운 두통과 뜻밖의 고뇌를 맛보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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