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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ㅣ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원죄론 이니 하는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인터넷 상으로 보도된 기사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아주 종종 그 몇 줄짜리 글속에서 정말 놀랍도록 절망스러운 수치들을 마주하게 된다. 공원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는 기사에 따르면 경찰청 통계로 한해 평균 2940건의 범죄가 ‘공원’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아동 성폭행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기사를 보면 2009년에는 한 해 동안 하루에 평균 44건의 성범죄가 발생했으며 그 가운데 6.3%가 아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최근의 기사도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통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서울특별시에서 발생한 5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행)건수는 총 6만3185건에 달한다. 통계의 맹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우리가 사는 이 좁다란 땅덩어리에서는 매일 수많은 범죄가 발생한다. 매일 지나치는 공원에서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고 강간을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딘가 골목에서 누군가는 강도를 만났을 지도 모른다. 어떤 이가 악의를 품은 누군가의 손에 허망하게 목숨을 빼앗겼을 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어느 공간에서 일수도 있고, 내가 지나치는 그 곳에서 일수도 있다. 참 무서운 이야기 이다. 소름 돋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상황이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쨌거나 나는 모르는 일이다. 무지는 죄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정말 무지와 무관심은 죄가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임에도? 설사 알게 되더라도, ‘내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다. 두렵기 때문에 ‘두려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은 본능적인 의지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어쩌면 무지, 무관심, 무책임 이 모든 것이 더 악질적인 죄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편안한 이 순간에 조차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된다.
납치된 여자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
납치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145cm의 최단신 형사 카미유 베르호벤은 상처한 슬픔을 떨쳐내기도 전에 파리 한복판에서 일어난 미모의 여성 납치사건을 맡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미유는 그의 충실한 동료인 잘생긴 부호형사 루이와 지독한 구두쇠 형사 아르망과 재회한다. 카미유 반장은 아내의 일과 겹쳐지는 이 불쾌한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고자 수사력을 총 동원해 납치 용의자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성급한 작전으로 용의자를 어이없게 잃고 만다. 납치된 피해자의 신분도 확인하지 못했고, 그녀의 생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다. 이대로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여성이 아무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허망하게 죽어갈 것이다.
카미유 반장은 수사방향을 바꿔 납치 피해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사라진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녀의 실종을 알리는 신고전화는 걸려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이다. 카미유는 용의자에 휴대전화에 남은 피해자의 사진을 토대로 그녀에 정체를 수사하는 한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끔찍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그녀는 어째서 납치범의 타깃이 된 것일까? 발견된 시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녀에 대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는 그녀, 나탈리, 레아, 줄리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카미유 반장은 직감한다. 그녀를 찾아내야 한다. 아니, 그녀를 잡아야 한다.
알렉스는 왜 슬픈 살인자가 되었나?
표지와 내용소개에서 알리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실 이것은 1부의 가장 큰 반전내용이다. 뭐 이미 다 밝히고 있는 부분이니 당당하게 언급하겠다. 알렉스는 살인자다. 그녀는 수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빨간 머리의 레아, 갈색머리의 줄리아, 금발머리의 나탈리. 그녀가 다녀간 곳에서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시체들이 즐비 한다.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된 피해자들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분모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일까? 어째서 그녀는 신분과 모습을 바꿔가며 살인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것이 3부의 핵심적인 의문이자 이 소설의 핵심이다. 왜, 어째서 알렉스는 살인자가 되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사회파 스릴러 류의 소설로 홍보되고 있는 점이다.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를 뛰어넘는 유럽 사회파 스럴러의 거장! 이라는 거창한 홍보문구와 함께 말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사실 처음 선뵈는 작가이고 나에게는 <알렉스>가 그와의 첫 대면이니 홍보문구에 대해 어떤 의견을 보태기는 좀 뭣하지만, 그런 장르로 분류된 <알렉스>라는 소설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사회파 스릴러물이라는데 과연 남은 이야기가 어떻게 풀어질까에 대한 의문으로 2부를 견디고 3부에 와서 좀 멍해졌다. 1부의 내용은 읽기 전부터 드러나 있었고 2부는 잔혹한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좀 지루한 반면에 3부는 선정적이고 파격적이다. 상상 이상의 전개가 이어지는 3부는 알렉스 사건의 진실부터 결말까지 반전이 여기저기서 넘처난다. 비로소 알렉스가 살인자가 된 이유(그것도 ‘슬픈’이라는 수식어를 단)가 드러나는 것이다.
알렉스는 왜 슬픈 살인자가 되었을까? 가 이 책이 이야기 하고 있는 핵심일 것이다. 서두에 끄적거린 궤변은 지나친 과장 혹은 호들갑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무지와 무관심과 안일한 무책임이 엄청난 괴물을 키워낼 수도 있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괴물을 만들어 내는 그 죄 아닌 죄는 이기주의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생한다. 사회 고발 프로그램의 아이템이 수십 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넓지도 않는 땅덩이에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살면서 해마다 끔찍한 강력범죄들이 감소하기는커녕 늘어나는 이유는, 내 일이 아니므로 나서지 않고 쉬쉬하며 지나쳐 버리는 가면을 쓴 사람들의 죄이다. 한 사람이라도 OOO 했다면, 같은 말을 혐오한다. 아마 그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국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은 사람에게 용기와 오지랖의 중간 쯤에 있는 ‘어떤 것’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사람들은 대게 비슷비슷 하다. ‘구원의 손길’이라는 말은 종교에서나 사용하는 말이 되버리진 않을까? 그런 세상이라면 괴물이 된 자가 스스로 정의를 외치며 심판자로 나서는 날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물을 비난해야 할까? 우리 자신을 비난해야 할까?
책 속의 글.
카미유는 걱정이 깃든 눈길로 창밖의 재난을 바라보고 있다. 제리코가 그린 <대홍수>와도 같은 처연한 심판의 전조가 먹구름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위에 널리 퍼저있는 이 위협적인 기운은 그저 두려움이 극대화된 것일 수도 있다. 카미유는 생각한다. 우리의 이 알량한 삶에 지나치게 매달려선 안 된다. 세상의 종말은 뚜렷한 형세 변화를 통해 도래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렇게 일상적으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 284쪽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던 여자가 죽은 것이다. 이것은 중세시대 때 사람들의 손에 늑대가 처치되었다고 공고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그런다고 해서 세상의 표면이 바뀌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는 우리를 안도하도록 다독이면서 사람들이 따르고 의지할 만한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뢰감을 세간에 퍼뜨린다. 사람들이 따르고 의지할 만한 정의란 그러므로 환멸스러운 공모의 수렁 속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 415쪽
“당신들, 증거 있습니까?”
“하아!”
그쯤해서 그런 기함과 함께 다시 카미유가 나선다. 그 소리는 기쁨의 탄성처럼 시작해서 탄복을 금치 못한다는 투의 웃음으로 끝난다.
“하하하, 나는 이렇게 나올 때가 제일 좋더라!”
“참고인이 증거가 있느냐고 물을 때는,” 카미유가 바로 말을 잇는다. “그가 더 이상 최종결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자인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거든요. 그런 사람은 그저 붙잡고 늘어질 지푸라기라도 찾느라 발버둥치기 마련입니다.” - 426쪽
“진실이라, 진실이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반장님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 5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