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군대를 제대하고 2학년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기 전, 호주에 갈 수도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반복된 일상에 여행이 가고 싶었다. 흔한 여행이 아닌 그곳에 머무르며 일도하고 그곳의 문화와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무엇이 두려웠는지, 함께 가자고 친구에게 먼저 제안을 해 놓고는 친구만 떠나버렸다. 그 무모함이 무식해보이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친구가 그곳에서 보내준 하늘은 똑같은 하늘임에도 푸른빛이 더 돋보였고 구름도 선명했다.

 

 

 

 

같은 시인이고 같은 곳에서 30일 동안 머물렀다.

시드니에서 두 남녀 시인의 사랑이야기 같지만, 크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도 일반 연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았을 뿐이다. 다투고, 화해하고, 웃고, 같이 걸으며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그래, 장소가 조금 다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성실히 바뀌는 한국의 경우는 여름 다음에 가을이 오겠지만 시드니는 그 성실함을 거꾸로 올라가 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 박연준은 한국에서의 익숙해진 계절 순환 때문인지 봄이 가을로 비추어 보인다고 말했다.

 

 

 

 

고글을 쓰고 방글방글 웃으며 찍은 스카이다이빙과 사막 썰매 그리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떠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나는 떠나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글과 그림으로 마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뮤지컬을 본 것처럼 말하고 비 내리는 호주의 어느 거리를 걸었다고 착각한다. 변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을 함께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천천히, 조심히 걸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두 시인의 염원이 담긴 제목이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더욱 선명해지는 그림자 혹은 어둠에 흐릿해져가는 그림자. 그렇게 하루 종일 걷고 걸으며 사랑을 외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걷겠다.

 

 

 

 

 

 

 

 

 

나라는 존재. 나이, 성별, 피부색, 태어난 곳, 지문, 키와 체형, 분위기, 머리카락 색과 굵기, 나를 낳거나 키운 사람들, 일가친척들. 여기서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여러 번 고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단 한 번’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외에도 사는 곳, 전공과 직업,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자주 가는 곳, 생활습관, 만나는 사람, 옷차림, 취향, 표정 등 얼마나 많은 것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걸까? 이것들은 관성이 붙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내가 열두 살이라거나, ‘말랑한 영혼을 가진 스무 살’이라면 모를까. 변한다는 것은 ‘인생이 변한다’는 것이다. 색깔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노란색이 초록색이 되거나 파란색이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얼마나 여러 가지와 몸 섞어야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본바탕은 이미 일곱 살 이전에 결정나는 것일 텐데. -p16 박연준-

 

 

 

 

바다를 건너려는 밤이다.

크리몬 포인트에 가기 위해 페리를 기다리는 동안 어두워졌다. 저녁이 밤으로 몸피를 바꾸는 순간을 알아채지 못했다.

시골에서는 밤이 오는 모양을 상상 할 수 있다. 시골의 밤은 성큼성큼 걸어오거나 점층적으로 번진다. 반면 도시의 밤은 덮치듯이 온다. 도착을 알기 어렵다. 어둠을 훼방하는 인공조명들이 기괴하게 반짝이며 밤보다 앞서 도착한다. 밤의 표면이 빛으로 까진다. 첨탑과 마천루를 타고 흘러내리는 밤의 노란 피들. 도시의 밤은 힘겹게 깊어진다. 완전히 어두워지는 데 실패한다.

-p88 박연준-

 

 

 

 

알베르 카뮈는 산문집『여름』에서 “나는 바다에서 자라 가난이 내게는 호사스러웠는데, 그후 바다를 잃어버리자 모든 사치는 잿빛으로, 가난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쓴다. 잊을 수 없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문장이다. 나는 가난의 모멸감을 이겨내려고 이 문장을 애써 기억에 담았다. 마흔 해가 흘렀는데도 이 문장은 내 기억에 선명하다. 부유하는 삶이 닻을 내리게 하고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준 것들이 있었다. 시와 음악, 그림과 철학이 그것이다. -p134 장석주-

 

 

 

 

시드니에 와서 나는 날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는데, 내가 걸으면 안에서 누군가는 멈춰 선다. 내가 멈춰 서면 안에서 누군가는 걷기 시작한다.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것은 아마도 ‘나’라고 부르는 존재일 텐데, 나는 그 ‘나’를 다 알지 못한다. ‘나’를 구성하는 것이 살과 뼈만은 아닐 것이다. 몸은 분명 살과 뼈로 이루어지지만 오장육부 그 어딘가에 영혼이 있다. 영혼 안에는 한줌의 꿈, 한줌의 연민, 한줌의 외로움, 한줌의 욕망이 있다. 건각의 위용을 뽐내며 시드니 거리들을 걸을 때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인다. -p183 장석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