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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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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한없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병에 걸리지않기 위해 매일 아침 알로에를 갈아대는 믹서기 소리. 초록불이 바뀌어도 성급히 발을 뻗지 않고 좌우를 살피는 치밀함. 내일을 위한 저축, 내일을 위한 공부, 내일을 위한 오늘의 모든 것. 그러니까 지금 바로 현재, 숨 쉬고 있는 순간 하나하나가 허무하다. 죽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온다.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경계선이 결코 멀리 있지도 그리 두껍지도 않다는 걸 인식한다.


 부당한 죽음 앞에 소멸하는 삶이란, 얼마나 허무하고 억울한가. 세상의 모든 일이 뜻대로 순리대로 이뤄지지않는다고 하지만, 죽음을 결과로 낳는 부조리는 결코 돌이킬 수도, 어떤 식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분노는 당사자가 아닌 그 당사자의 죽음에 가장 슬퍼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붙잡고 '살려내라'며 불가능을 애원하고, 가끔은 그 분노의 방향을 알 수 없어 오히려 황망하게 무너져 땅만 치며 울어버린다. 이 눈물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눈물이 아니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친구. 내 사람을 죽인 세상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다. 그들은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마음껏 추억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미련한 끈을 붙잡고 놓지 못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죽은 이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대신 안고 사는 이들이 등장한다. 한 걸음 물러선 채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문체는 덤덤하고 그들의 말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다. 상황은 너무도 슬프고 아픈데도, 그들은 그걸 툭- 던져놓고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을 할 힘조차 잃은 모습이다. 무표정하게 꾹 다물린 입매에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영웅적이게 상황을 진두지위한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져 희생하는 그런 극적인 인물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책감과 양심으로 수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도 당시 그들이 떠나보낸 죽음을 잊지 못하고 감히 슬퍼하지도 못한다. 친구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죽음이 두려워 도망친 중학생 아이는 결국 하늘색 교련복을 입고 총대를 매고, 정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머니는 나머지 자식마저 잃을 것이 무서워 막둥이 찾기를 머뭇거리다 아들의 시체 앞에 시위에 나서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장례식이 되어버린 삶. 그 아픔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힘은 충분하다.


 외어야 하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중학교 시절 나는 '5.18'을 원인-전개-결과의 순서로 노트에 필기하며 달달 외웠다.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1980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광주에서 많은 희생자…. 암기과목에 자신있었던 나는 국사 과목의 점수가 좋았다. 그러다 가족이 다 함께 극장을 찾아 관람했던 <화려한 휴가>를 통해 나는 5.18의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교과서에 적힌 '역사'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었다,는 사실보다 나는 그들의 삶이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5.18은 분명 정치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죽음은 결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을 왈가왈부하는 일에 정치적인 의도를 섞게 되면,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이 될 수 있는 일이 거짓으로 매도될 위험이 생긴다. 나는 이 책을 5.18을 중점적으로 읽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퍼할 수 없는 슬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너무도 아프게 느꼈다. 역사는 알아야하고 외워야하는 것이지만, 소설을 통해 읽는 역사에서 얻어낼 지점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적 문장이 아닌, 한강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5.18은 역사를 넘어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아파해야 할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부당한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새기게 된다. 슬퍼하기도 전에 우리는 왜 분노에 먼저 지쳐야 하는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고 이상한 힘같은 것을 얻었다. 남들의 슬픔을 읽고 힘을 얻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어떻게보면 이기적인 일일테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은 죽음 앞에 초연해져 무기력해진 내게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묵직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정말 하루에도 몇번씩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로 사람들이 '가볍게' 죽어나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으며 남아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 역시 한층 더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너무도 쉽고 가볍게 죽어버리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토록 죽음은 남은 이들을 아프게 한다는 당연하지만 늘 잊고마는 사실. 


 봄이 오면 벚꽃이 피어난다.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언젠가 지구 온난화로 '봄'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3월과 4월의 경계 쯤, 봄이 이 어드매에 머물러 있었거니 추억하는 것 조차 무색하게 날은 여름과 겨울 둘로 나뉠 것이다. 하지만 5월 18일. 그날은 100년이 지나, 그 후에 또 다시 100년이 지나더라도 사라지지않는다. 그 시간 속에 살아가던 이들이 떠날지라도, 그날이 남긴 거룩한 핏빛의 역사는 매년 회자되어 남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다. 외어야 할 것은 외우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하는. 그리고 죽음의 무게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그날.        


소년은 다시 올 수 없고, 그날만 계속해서 찾아온다.

소년은 다시 올 수 없지만, 그날은 계속해서 찾아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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