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재는 남성의 전유공간이다.
적어도 이 병풍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이 명제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의 서재를 그린 그림이 나타났다. 바로 개인소장 책거리도 다.
2015년에 간행된 『한국의 채색화에 소개했고,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문자도 책거리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림 속의 기물들을 살펴보다가 어느 순간 여성의 서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경상 밑에 비스듬히놓여있던 주황색의 신발이 부녀자들이 싣는 당혜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여성의 서재로까지 보지는 않았다. 어느날 이 작품을 들여다보니, 여성용의 기물이 더 눈에 띄었다. 신발뿐만 아니라 동백기름을 넣는 향수병이 보이고 경대도 눈에 띄었다. 또한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 이슬람풍의 철화백자 혹은 청화백자도 여성취향의 도자기들이라 예쁘장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화면의 중심에는 책을 보관하는 책함을 두고 그옆에 책을 쌓아두어 책거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책함 위에 서랍을 얹은 경우가 있고 주석의 노란 뻗침대가 장식의 효과를 드높이고 있다. 아무튼 이 책거리는 젠더 Gender의 관점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인 것이다. 일부 여성용품이 보이는 책거리는 더러 있지만, 이처럼 여성의 서재로 볼 수 있는 책거리는 드물다.
그리고 보니 첫 폭에 장도로 수박을 관통하는 장면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보통 민화 책거리에서는 위가 잘려진 모습의 수박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잘라진 면 위에 보이는 씨들이 다남자 男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처럼 길상적인 수박을 섬뜩하게 표현한 것일까? 왜 아름답기 그지없는 책거리에 엽기적인 행위를 넣은 것일까?

이 책거리는 단순한 기물들의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복선이 깔려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작품을 본 범어사성보박물관 이정은 학예실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애 낳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 것이 아닌가요? 맞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다남자의 상징인 수박을 부정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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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갖고 있는 지식인층의 여인은 이미지가 지닌 은유와 상징을 통해 영리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조선의 여인들에게 숙명적으로 부여된 다남자의 의무 아닌 의무에 대해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과연 조선시대에 이러한 여성의 의식적인 행위가 가능할까? 필자만의 상상력이 아닐까? 조선시대 여인이라면 가부장중심 사회에서 가정을 지키고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후세를 낳아 키우는 역할을 하는 순종적인 여인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여성들의 의식과 사회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특히 국문 소설의 보급과 독서 열풍은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허난설헌처럼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여류문인들은 물론 어장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강정일당 美靜一堂, 임윤지당任允堂 등 여성 성리학자가 등장하고, 이사주당은 태교 관련 저술인『태교신기』란 책을 발간하기도 한다. 더욱이 조선후기의 소설 열풍을 이끌었던 이들 역시 여성들로, 소설이 성장하는 데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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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는 민화다
정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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