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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윤대석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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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은 관동군의 전략거점으로 시작되었으나그 발상은 민족협화왕도낙토라는 이념으로 다양한 행위자들을 불러모아 이상국가를 건국하려는 운동의 장으로 포장되었다머리는 관동군몸통은 천황제꼬리는 근대 중국으로 구성된 키메라’ 만주국에서 민족협화와 왕도낙토 따위의 이념은 분식에 불과하였을 뿐 만주국은 관동군 중앙독재의 국방국가였다변형을 거듭하여 완성된 모조(模造)천황제 만주국의 천황을 위한 전력투구는 만주국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선반도를 확보해야한다는, 주권선과 이익선에 관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연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에 제기된 아먀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은 더욱 확장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국권회수운동과 국민당의 북벌에 직면해서는 전쟁으로 전쟁을 유지하는” 총력전을 위해서나아가 세계최종전으로서의 일미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거점으로서 만주를 영유해야한다는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의 만몽영유론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만몽영유론은 육군 중앙부의 반대로 독립국가 건설로 전환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관동군 주도의 건국 공작은 육군 중앙부와 외무성의 통제 밖에 있었다.하지만 갑작스레 만주에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어야 하는 이유에 관동군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여기에 덧붙여진 정당화가 현지 세력을 동원한 건국 공작과 왕도국가론이다.


관동군은 장쉐량에 반대하여 만주 지역의 독립성을 주장하던 세력들과 청조 복벽을 꿈꿔온 선통제파를 중심으로 하여 자발적 분리에 따른 독립국 건설이라는 방식을 취한 후 선통제 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웠다동시에 만주국은 재만 중국인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성립된 독립국이어야 했기 때문에 관동군은 '자발적인건국운동 단체로서 자치지도부를 발족시켰다자치지도부는 장쉐량과 군벌국민정부를 모두 패도정치로 규정하고 민중자치의 왕도국가 건설····몽의 공존공영이라는 민족협화안거낙업순천안민의 낙토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건국운동을 주도하였다하지만 자치지도부의 건국운동은 메이지 천황의 위대한 뜻을 받들어진정 일본이 짊어질 대사명의 제일보를 이 인연 깊은 만몽의 땅에 내리려는 데 있다.”라고 하는 <지방자치 지도원 복무심득>에서 알 수 있듯이 천황제 국가 일본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짙게 밴 것이었고 이것이 만주국의 본질이었음은 만주국의 통치체제에서 드러난다.


관동군의 만주국 통치 기본방침은 만주국의 국방을 일본에 맡기고 일본의 말을 듣게끔 하여 "일만일체의 국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때문에 자치지도부와 같은 건국운동 단체들은 퇴조될 수밖에 없었고 관동군과 총무청 중심의 중앙독재주의에 가까운 통치체제가 성립되었다이후 만주국은 두 가지 변화를 통해 일만일체를 이뤄가는데 하나는 1934년 제제만주국으로의 이행이고다른 하나는 행정테크노그라트 관료의 진출이다. ‘2키 3스케로 대표되어 전후 일본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행정테크노그라트 관료들은 일본 각 성에서 파견되어 일·만 행정의 일체화를 꾀하였고 1937년에 이르러서는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통제경제를 주도하였다이렇게 일만일체를 이룩한 모조(模造)천황제 혹은 상사형(相似形)’천황제 만주국은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식량 창고로서 기능하였거니와 당초의 왕도국가민족협화로부터 멀어진 일본의 국방국가병영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왕도국가민족협화를 위해 만주국에 뛰어든 몇몇 자들의 순수한 신념까지 비난할 마음은 없다그러나 만주국을 만들어내고 변형시켰던 것은 일본 민족이 정치의식이 미약한 중국을 지도해야 하고 일본 민족이 아시아의 부흥을 주도해야 한다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극도의 자민족 중심주의였다그리고 이것은 바로 야마무로 신이치가 규정하듯이 키메라 만주국의 몸통이자 근대 일본의 본질인 천황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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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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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복잡성과 문화적 복합성 속에서 여러 종족집단이 느슨하게 공존해오던 발칸에서는 19세기에 외세의 영향을 받으며 발칸화가 진행되었다발칸의 각 민족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여러 나라로 분립된 발칸화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됨에 따라 배타적 민족주의가 분출되고 외세가 개입하며 촉발된 동방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국가종교로 구성되는 국민국가 체제의 발칸 국가들이 자행한 폭력과 야만의 원인은 더 넓은 맥락에 포함된 것이었으므로 발칸 고유의 것만은 아니었다.


발칸 반도는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산맥이 없어 외부의 침입에 취약하였고내부 지형은 복잡하여 교통망을 정비하기도 쉽지 않았기에 주민들은 주로 마을을 중심으로 살아갔다. “유럽의 터키라고 불리던 이 지역은 19세기 무렵부터 발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이 시기 부여된 지명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발칸에는 지리적 개념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오스만제국이 미증유의 종교적 관용을 실천하여 기독교도를 짐미’(zimmi, 보호받는 민족)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서유럽인 기독교도들의 편견이나 발칸의 민족주의적 애국자들의 자손들이 쓴 역사와 달리 이 지역에서 다양한 민족문화종교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마케도니아의 농부들이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발칸 사람들에게 종교는 공유 자원이었고 언어의 경계는 불분명했다.


오래된 공존은 오스만제국 와해와 민족주의 분출이라는 이같은 예측불허의 일들을 국제적으로 처리하는 과정”, 즉 동방문제가 등장하면서 깨지게 된다동방문제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력이 토착지주층의 형성과 예니체리의 반란을 겪으며 흔들리자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세력확장을 노리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및 이들을 견제하는 외세가 발칸에 개입하면서 발생하였다이는 민족성의 구분에 따라 국가를 새로 건설하여 발칸 각지가 분립되는 발칸화로 이어지게 되었다세르비아는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독립이 결정되었고같은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의 원조를 받지 못하여 실패한 그리스의 독립 시도는 이후 두 번째 봉기에 이르러 국제적 힘의 균형이 변화함에 따라 외세의 원조에 힘입어 성공하였다루마니아의 독립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발칸의 파리를 만들고자 한 프랑스의 개입 덕분이었다민족국가의 건설이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외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독립은 언제든지 외세에 따라 흔들릴 수 있는 것이었다.


민족적 동질성을 근간으로 하는 국민국가 체제는 마을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발칸 사람들에게 특정한 종교를 믿고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였다여기서 소수민족 문제가 비롯되었는데, “불가리아그리스보스니아의 무슬림과 루마니아의 헝가리인과 같은 주민들은 소수민족으로서 다수 민족의 언어를 익히거나 개종을 해야 했다언어의 경계는 뚜렷해졌고 종교는 더 이상 공유 자원이 아니었다소수민족 문제와 같이 나타난 문제가 영토회복주의였다그리스의 대그리스주의와 불가리아의 산스테파노 불가리아에 대한 향수는 발칸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동방문제에서부터 발칸화로 이어지는 발칸의 국가 건설 투쟁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잠시 봉합되었다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지만 발칸은 국제 경제라는 또 다른 형태로 외세의 위협을 마주하게 되었다.


폭력과 야만, ‘유럽의 화약고라는 발칸에 대한 심상은 19세기 이후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상당히 크다19세기 이전 다채로움” 속에서 느슨하게 공존하던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과 국가 건설’ 이후 발칸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국민국가라는 구조물에 내재된 배타성과 폭력성을 보게된다.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을 지배한 오스만제국의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오가사와라 히로유키의 오스만 제국, ‘국가 건설’ 이후의 발칸이 어떻게 제1차 세계대전(유럽대전)으로 얽혀드는지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을 읽음으로써 그 특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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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교회정치학
게르트 타이센 지음, 류호성 외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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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전달하며 특징적인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각 복음서의 그리스도론은 각 공동체의 특징적인 신학의 산물이자 복음서를 통해서 교회를 지도하고자 한 교회정치학의 산물이다. 게르트 타이센은 사회-수사학적 접근을 활용하여 네 복음서가 수행하는 교회정치학이라는 사회적 기능과 복음서에 반영된 삶의 정황을 탐색한다.


리처드A.버릿지에 따르면 복음서는 전기. 슈미트와 불트만 같은 학자들은 복음서를 대중적인 민속문학,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 모음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리처드A.버릿지는 복음서와 그리스-로마 전기와의 유사성으로 미루어 보아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전달하는 전기라고 주장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남긴 예수 전승(Q)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 공동체에 적합한 형태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이들은 복음서를 통하여 각 공동체 고유의 신앙을 해명하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데, 여기에는 각 공동체의 삶의 정황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학자들은 복음서 연구를 위해서 복음서 이야기를 그 양식에 따라 분석한양식 비평과 동일한 이야기를 어떻게 편집하고 해석하였는지 분석하는 편집 비평이라는 방식을 활용하였다.


게르트 타이센이 시도하는 방식은 사회-수사학적 접근이다. 게르트 타이센에 따르면 복음서의 저자는 단순히 전승의 전달자독창적인 신학자도 아니라 공동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복음서를 통해 1세기 공동체의 일상적 삶을 위하여 성서적인 기초를 만들고자하였던, 즉 교회정치학을 실현했던 공동체의 지도자이다. 교회정치학의 과제는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공동체의 신념과 전승에 일치하는 예수상을 창조하여 공동체 내의 합의를 만들어내고, 공동체의 예수상을 정당화시키는 것. 둘째, 주변 세계(로마 제국)와의 관계에서 특정한 방향성을 제공하는 것. 셋째, 모종교인 유대교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 넷째, 공동체 내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 다섯째, 공동체 내의 권위 구조를 형성하는 것. 이렇게 볼 때 복음서는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와 공동체 사이에 일어난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복음서 내에서 교회정치학이 어떻게 수행되는지 마가복음서를 통해서 살펴보자. 마가복음서가 기록되던 70년경은 로마 제국의 혼란기였다. 제국의 혼란기에 새로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는 선전을 벌였다. 마가복음서는 바로 이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하며 섬기는 왕에 의한 -복음을 제시한다. 복음서를 저술하는 과정은 공동체 내의 모순되는 전승을 통합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마가 기자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수난 이야기복음이라는 표제어 아래 통합시켰고, 복음은 마가복음서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비밀 모티프를 덧붙여 이 통합을 정당화하였다. 한편, 유대교의 성전이 파괴되자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성찬식이라는 독자적인 제의를 만들어냈는데, 마가복음서는 예수가 죽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전승을 덧붙이며 성전 중심의 제의가 종결되었음을 보여주며 이 새로운 제의를 정당화한다.


이처럼 복음서는 특정한 컨텍스트에서 형성되어 다시 컨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교회정치학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게르트 타이센의 사회-수사학적 접근은 텍스트가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힌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각 복음서의 토대가 되는 공동체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직접 복음서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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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탄생 (반양장)
게르트 타이센 지음, 민경식.박찬웅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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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부터 시작된 유대교 갱신 운동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냈다. 이 술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무엇인지, 예수는 누구인지, 유대교는 어떤 종교인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와 같은 물음에 답해야 한다. 게르트 타이센은 이러한 물음에 답하며 유대교에 대()하여 형성된 원시기독교가 유대교와 단절하고 독자적인 기호체계를 성립하는 과정을 종교학적으로 설명한다.


게르트 타이센은 기어츠의 분석을 활용하여 종교란 신화, 제의, 에토스로 구성된 '하나의 문화적 기호체계'라고 정의한다. 신화는 "세상과 삶을 기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화를 통해서 밝혀"주는 것이고, 제의는 "신화에 언급된 이질적 현실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에토스는 "신화의 의미를 행동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각각의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마치 한 언어의 문법과도 같은 종교적 기호체계를 만들어낸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파생된 종교적 기호체계다. 그리고 이 기호체계의 중심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있다. 그렇지만 예수는 헬레니즘 문화에 저항하는 유대교 갱신 운동을 주도한 것이었지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특징적인 면모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 예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라는 신화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구현자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유대교의 형식적인 제의와 율법을 비판하며 성전파괴를 예언하였고 토라의 규정을 급진화시켰다.


예수는 성전 파괴를 예언하고 왕을 참칭하였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의 '메시아 대망'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이에 뒤이은 부활 현현 사건은 이들에게 당혹감을 일으켰다. 제자들은 '유일신 신앙'에 기대어 이 모순을 해결하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낮춰짐을 통한 승리"로 이해되었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되었다. 이제부터 원시기독교는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화를 바탕으로 유대교와 구별되는 제의와 에토스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원시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행해져 온 희생제의를 종결시켰다.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으로 해석되었고, 그의 부활은 반복되는 희생제의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원시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직접 참여하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새로운 제의를 만들어냈다. 에토스 측면에서는 이웃사랑의 범주를 모든 민족으로 확장시키고 자기 비움과 겸비라는 급진적 윤리를 강조하였다. 이렇듯 원시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임하였다는 '현재화된 신화', '구속 신앙'에 내재한 역동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호체계를 만들어나갔다.


유대교 내에서 점차 구별되어 나간 원시기독교는 복음서 저술과 바울의 신학에 이르러 유대교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기호체계를 완성한다. 복음서는 예수에게 신적인 면모를 덧입혔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새로운 제의와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에토스를 정당화하였다. 정경복음서 중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서는 원시기독교의 발생 과정에서 정점에 위치한다. 예수의 신적인 면모는 요한복음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계시한다. 바울은 복음서 전승과는 다른 방식으로 원시기독교의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유대교의 할례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유대파가 할례를 용인할 때에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토대로 이들을 거세게 비난하며 원시기독교의 독자성을 확고히하였다. 원시기독교의 기호체계를 보편 종교의 하위 범주에 위치시키려 한 영지주의의 도전에도 독자성을 지켜낸 원시기독교는 정경을 확정지음으로써 기호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기독교의 탄생은 유대교에 대응하면서 독자적인 기호체계를 완성하고 이를 개인의 경험과 역사 속에서 도전받고 검증받는 과정이었다. 이를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를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여기는 이해에서 벗어나 기독교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다만 게르트 타이센은 기독교의 탄생을 발전론적으로 서술하며 사실관계를 단순화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좀 더 엄밀한 이해를 위해서는 1세기 유대교의 모습, 초기 기독교의 정황과 같은 세부 분야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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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복음서들이 속한 역사적 맥락에서 복음서들의 사회적 기능을 증명하는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서 말하고 서술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어나가도록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고자했다. 언어로 청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기술은 수사학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서 해석은 사회 - 수사학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의 청중은 로마제국의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그룹들이다. 이 역사적 맥락에는 그 당시의 정치, 곧 로마제국과 새로운 기독교 교회와의 관계가 포함된다. 그리고 여기에 교회 내의 ‘정치‘도 포함되며, 이것은 교회 내의 권위의 기원과 관계된다. 나의 논제는 복음서가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기록하여 공동체를 인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 의해 쓰였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교회의 삶을 위한 기본적인 텍스트를 창조하였다.
이 접근 방법은 복음서들이 가지고 있는 정경적인 특성(canonicalquality)을 좀더 잘 이해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한 종교 집단의 근본적인 믿음, 기준 그리고 제의를 포함하고 있는 문헌들을 ‘정경‘이라고 이해한다면, 복음서가 작성될 때에는 이미 그 복음서 안에 정경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힘들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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