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
무쓰 무네미쓰.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이용수 옮김 / 논형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 있다.”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일본의 외교를 총괄하는 기구인 외무성의 공식 입장입니다. 이 외무성 앞에는 어느 한 사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 시기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성에 서 있는 유일한 동상입니다. 이는 그가 일본의 외교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책은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바로 <건건록>입니다.


무쓰가 외무대신이었던 1894,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에 대단히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이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무쓰는 톈진 조약을 들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p.20-21)

 

<건건록>동학당의 난(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무쓰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나 본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일본이 이 사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였습니다.

사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치닫기까지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무쓰는 청과 대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p.49)

 

무쓰의 주장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과 조선 조정은 서둘러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군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함께 군대를 철수하자고 일본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무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p.55)

 

조선의 내정이 어지러우니 개혁하기 전까지는 결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과 청나라의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이를 반영하듯, 각국에 주재하는 일본과 청나라 외교관들이 본국과 주고받는 교신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무쓰는 이미 감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보다 먼저 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치밀한 외교 활동을 통해 서양 국가들은 여기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

라고도 판단합니다. 과연 무쓰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p.142)

 

무쓰가 작성한 이 전문을 통해, 우리는 외교라는 것은 때로는 교섭을 통해 평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전문에 따라 1894723, 일본군이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p.76)

 

무쓰는 어떤 방법으로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감청했을까요? 이번에 번역된 <건건록>의 주석에 자세한 사정이 밝혀집니다지금 소개하는 <건건록>은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교토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의 교수로 강의를 했던 분입니다. 그는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논문과 책으로 공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업적을 소개하자면, 일본이 청일전쟁을 앞둔 1894723,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기습 공격을 했다는 공식 기록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일본 측의 왜곡 때문에 조선군이 선제 공격하여 일본이 반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잡은 것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를 조일전쟁이라 부를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청일전쟁의 목적도 조선 침략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 나카쓰카 교수가 <건건록>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그에 따라 무쓰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의도느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무쓰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그 내용을 바로잡고 보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이틀 뒤인 1894725, 아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합니다. 이렇게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몫으로 넘어갔을까요? 아니, 여기서부터 무쓰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개전 직후, 영국 국기를 게양한 채 아산으로 향하던 청나라 함선, 고승호가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됩니다. 바로 고승호 사건입니다. 고승호가 영국 국적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금방 국제 문제로 치달았습니다. 영국은 일찍이 비슷한 사건으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었지요(2차 아편전쟁). 무쓰는 외교 라인을 총동원하여, 고승호 격침이 정당한 행위였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 랴오둥 반도의 여순구를 점령한 일본군이 청나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여순구 학살이 보도되어, 일본에 대한 여론은 물론, 당시 진행되던 미구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 때 무쓰는 평소 일본군이 군기가 엄정했다고 주장하며 여순구 학살을 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에 관여합니다.

 

한편, 조선과는 일한양국맹약이라는, 일시적인 군사 동맹을 맺도록 합니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무쓰의 치밀한 기획에 따라 이뤄진 일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니 당연히 동맹을 맺을 권리가 있다고 국제 사회에 선전하는 한편, 실제로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동맹을 과연 동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일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결과는 동맹을 맺은 나라 백성들의 떼죽음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공주, 그리고 장흥에서 섬멸했고, 그 잔당을 철저하게 추적해 살해했습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을 일본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석연치 않은 군사 동맹과 동맹국 백성의 대량 학살. 그 의미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쓰는 청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무쓰가 조선에 이와 같은 외교 정책을 실시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건록> 전반에 걸쳐 조선에 대한 온갖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번역자인 이용수 연구원이 해제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책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무쓰는 안으로는 전쟁에 대한 일본 국내의 여론을, 그리고 밖으로는 열강의 동향을 살피며 전쟁 지도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 시기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지지와 청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예상치 못하게 일본이 선전을 거두자, 일본에 대한 인식을 크게 전환하게 됩니다.

 

무쓰는 이러한 상황에 편승해,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해 국민들의 욕망을 채우는 한편, 자칫하면 국민들의 감정이 교만으로 변하지 않을지 예의주시합니다. 한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데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는 전세가 유리한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유럽 국가들과 교섭하여,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 작업을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쓰는 외국이 점차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우세한 상황에서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긴박한 전쟁 외교를 개인의 내면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조야의 엇갈린 요구들이 사방에서 쏟아집니다. 이에 무쓰는 강화 조약을 준비하여 청에 강요했습니다. 청나라가 당시 국제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전권대사를 파견하자 이를 돌려보내는 등으로 외교상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이를 예상해 미리 각서까지 준비해 둔 것은 무쓰의 주도면밀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마침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회담이 열렸고, 청나라의 대신 이홍장이 왔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을 상대로 능수능란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때 이홍장의 외모에 대한 감상이나, 만날 때 느낀 바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외교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교섭에 활용하려는 태도는 한편으로는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이홍장은 강화회담이 패전에 따른 배상이 아니라, 청일 양국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역으로 청일 동맹을 주장하는 등 강화 회담의 프레임을 전환하고자 하는 노회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청나라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휴전을 주장합니다. 무쓰는 이에 대해 휴전 조건을 가혹하게 내세우는 식으로 이홍장의 시도를 저지합니다.

 

그러던 중,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몸을 내던져 강화 회담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홍장을 마구 비웃던 국내 인심마저도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국제 여론도 청나라에 동정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홍장이 주장했던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리게 된 것입니다.

 

강화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이홍장은 무쓰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p.286)

이는 일본의 앞날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쓰는 <건건록>에 이홍장의 이 말을 기록하면서, 자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1895417,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영토를 일본에 할양합니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합니다. 그 유명한 3국간섭입니다. 무쓰는 이 사건이 일본 육해군을 비롯해, 국민 일반에게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한편, 3국에 맞서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자칫하면 시모노세키 조약 전체가 파탄될 수도 있는 상황.

 

무쓰는 러시아를 비롯한 3국은 처음에 이와 같은 간섭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예상 외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탓에 간섭이 이뤄졌다고 판단합니다. 마냥 승리하는 것이 오히려 훗날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외교의 곤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서로 민족 감정으로 강렬하게 충돌했던 프랑스와 독일마저 한 편을 이루었을 만큼 상황은 중대했습니다.

 

전쟁은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싸움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라는 것임을, 그것이야말로 전쟁이고, 또 외교임을 <건건록>은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일본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 막상 실제 위협을 받자 강경하던 언론까지도 겁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p.365)

 

마침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합니다.

불과 2주 동안 일본을 뒤흔들었던 3국 간섭은 청일 전쟁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습니다. 이는 각국의 지략이 총동원된 또다른 전쟁이었으며, 그 한가운데 무쓰 무네미쓰가 있었습니다.

이 때 무쓰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굴욕감과 불만이 점차 커져 가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훗날 이 감정은 무쓰가 죽은 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치닫도록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은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패망하게 됩니다만 이는 과연 무쓰의 계산에 있었던 것일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전쟁은 무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쓰 무네미쓰는 이렇게 청일 간의 갈등을 유도했고,

청일 전쟁의 승리에 외교적으로 기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3국 간섭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방어하며 전쟁으로 얻은 이익의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일본의,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운명을 세 번이나 결정지은 것입니다.

 

<건건록>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외교관들의 사고방식 전반, 곧 그의 내면과 계산, 정책 결정 과정을 보여 주는 긴요한 자료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기획한 자의 기록.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동아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 전쟁에 휘말렸였으니, 이 중대한 기록을 읽을 필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 P20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 - P49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 P55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 - P142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 - P76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 - P286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 - P3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