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가수 왕롱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도 있다)
(p384)
1850년 이전에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기술적 격차는 크지 않았다.
동양에서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된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페르시아는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유럽인들은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pp397~400)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무슬림 경제학자들의 통찰을 배웠다.
극동과 이슬람 세계에도 유럽 못지 얺게 지적이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150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이들은 뉴턴 물리학이나 다윈 생물학과 비슷한 것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165명의 학자를 데려갔다. 이들은 이집트학을 구축했고 종교, 언어, 식물 연구에 기여했다.
15~16세기에 유럽인들은 빈 공간이 많은 세계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유럽인의 제국주의 욕구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계의 많은 부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1492년 콜럼버스는 여전히 과거의 '완전한' 세계지도를 믿고 있었다.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콜럼버스는 여전히 중세인이었다.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1499~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를 탐험한 그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섬들이 동아시아 연안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라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 주었다.(pp4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