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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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기분이다. 분명 내가 태어나기도 전 가보지도 못한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내겐 비슷한 추억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데도, 읽는 내내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책을 처음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도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기는 커녕 고마웠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길.

 

 길과 인생을 결부시킨 책. 세상에 수없이 많은 진부한 이야기와 노래들. 하지만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 울티모의 길은 그렇지 않다. 목적지가 없는 길, 거창한 어떤 곳으로 통하는 길, 유혹과 방황이 가득한 길 등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 찬 길이 아니라 완성된 하나의 서킷. 여러 개의 굽이들이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런 길이다. 주인공 울티모는 길에 심취한 남자, 오직 평생을 그런 길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목적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의 결과물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고 싶었던 것을 했고 자신만의 길을 이루었다. 그것이 울티모라는 인간의 강한 의지의 산물, 신이 내려준 재능과 영감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것보다는 노래하는 새들, 집을 짓는 개미들, 물을 거슬러 오르는 고기들 같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어떤 본능 같은 것. 울티모에게 길의 완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음악.​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는 울티모의 어린 시절, 카포레토 회상록, 엘리자베타, 잉글랜드의 시닝턴, 천 마일 레이스 크게 다섯 부분으로 각 장이 나누어져 있다. 각 부분의 화자는 조금씩 다르고, 그 분위기도 다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울티모가 인생의 굽이굽이들을 담아 하나의 길을 완성했다면, 바리코는 그 굽이들을 글로써 묶고 있다. 그리고 그 글과 함께 흐르는 듯한 음악이 이 책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든다.

 

울티모의 어린 시절은 순박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카포레토의 이야기는 비극적이고 슬프지만 결코 어둡고 처절하게 그리지 않았다. 엘리자베타의 일기는 그 악의적이고 불순한 생각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함과 위태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불안함이 뒤에서는 반대로 울티모와 엘리자베타를 더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울티모의 길을 마주한 엘리자베타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키득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과 때로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벅찬 울림까지... 한 권의 책에 소박함과 웅장한 어떤 것들이 동시에 들어있으면서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질 않다니. 알레산드로 바리코라는 작가에게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

 


 이야기에 끊임없이 죽음이 등장하고,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공담과 안정된 삶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책이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은 낭만적이고, 우아하고, 풍족하고, 멋있다. 어둡지 않다. 울티모도 엘리자베타도, 인간을 타락시키거나 억누르는 가장 큰 적인 '돈'에게서 자유로웠기 때문일까. 울티모는 그때그때 만났던 삶의 굽이들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을 추구했다. 엘리자베타는 비록 평생 자신의 길을 갖진 못했지만 울티모를 찾는 여정 끝에서 그의 길과 만나, 그의 음악을 들어준 유일한 관객이 될 수 있었다.

 

길이란, 삶이란 무엇일까.

 

열정이 집착처럼 보이지 않고, 과거에 대한 그리움, 사랑이 미련이나 후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초라해보이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 가득한 강박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꿈.

 

꿈이다.​

 

울티모가 끝까지 지켜 자신의 길에 담은 꿈에 나는 내 삶에 대한 어렴풋한 희망을 가져본다.

 

한 폭의 그림이 되기 위해서, 한 편의 시와 노래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길이 되기 위해 살았던 소박하지만 위대했던 그 소년의 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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