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소연진아일 동안 황선미 선생님이 들려주는 관계 이야기
황선미 지음, 박진아 그림, 이보연 상담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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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말은 이렇게 난처하고 한심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꼼짝도 못 하게. 생각도 없는 애처럼 보이게. 25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심리적 장애를 뜻한다. 책 속 진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소연이라는 친구의 도우미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그저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거절하지 못한 도우미 역할은 진아의 마음을 점점 옭아매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진아. <내가 김소연진아일 동안>은 선생님의 말을 지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진아의 내면을 통해 '착한 아이'라는 꼬리표가 아이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생채기를 내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황선미 작가는 이미 <나쁜 어린이표>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의 내면의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책의 머리말에는 아이들의 외롭고 억울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오롯이 어른의 몫이라 했다. <내가 김소연진아일 동안>에서도 속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내면을 알아봐 줘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은 계속된다. 진아가 억눌린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곁에서 진아를 자세히 바라봐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아는 최대한 조용히 내 할 일만 하는 소심한 학생이다. 열 살 전에 엄마를 여의고 새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로 엄마를 그리워한다. 장난꾸러기 정우가 수돗가에서 장난치는 바람에 웃옷이 젖었을 때, 아무 말없이 수건으로 몸을 가려주었던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을 잊지 못해 진아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칭찬받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아이이기도 하다.

진아 반에는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다른 소연이라는 친구가 있다. 선생님은 진아에게 소연이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진아는 소연이 '도우미'가 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좋아하는 선생님의 말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소연이의 도우미가 되는 일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잊어버린 준비물을 대신 챙겨주고, 같이 등교하고, 웬만하면 숙제도 같이해야 한다. 스물여덟 명의 친구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도우미'가 된 진아에게 반 아이들은 소연이와 관련된 모든 일을 떠넘긴다. "너 김소연 도우미잖아. 그러니까 네가 해."

그래도 진아가 묵묵히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수건으로 몸을 가려주었던 따뜻한 선생님이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훈이가 단지 소연이와 함께 오카리나 연주를 하기 싫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자신이 얼마나 연습했는지, 얼마나 잘하고 싶어 하는지 묻지 않고 소연이와 함께 연주하도록 한다. 그래서 진아는 싫다는 말 대신 가장 소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소연이와 함께 하는 오카리나 연주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부들거리는 모습은 진아의 내면 모습이었다.

내가 이러는 건 나 때문이다. 순전히 나 때문에. 이렇게라도 심통을 부려야 속이 풀리는 것 같아서.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니 벽에 대고 분풀이하는 셈이지만 52

소연이 도우미를 하는 일은 그 무게만큼, 선생님을 실망시키기 싫은 만큼 진아는 점점 삐딱하게 변해 갔다. 그러나 곪았던 상처는 터지기 마련이다. 진아의 억눌린 감정은 결국 도우미를 거절했던 하나가 도우미가 해야 할 일을 운운하자 폭발한다. "싫으니까 거절해 놓고, 말까지 그렇게 하니? 이럴 자격도 없어. 너." 그렇지만 여전히 진아는 거기서 한 발자국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말로 쏟아내는 대신 그런 자신의 감정을 모두 비밀일기장에 기록해 둔다. 그런데 비밀일기장을 새엄마가 보게 된 사실을 알게 되고 무척 화가 난다. 착한 진아는 새엄마에도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긴장하고 억눌린 감정을 집에서도 풀지 못하고 다시 억눌러야 하는. 진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이 되어간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고서도 고작 소연이네 마당에 있는 꽃을 꺾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소심하게 표현한다. 입으로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손으로 가서 소연이를 꼬집고 괴롭히기도 한다. 이게 최선이라고 변명하면서. 그저 누군가 점점 변해가는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책을 읽는 내내 진아 곁에 있는 엄마, 선생님, 다른 친구들이 진아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했다. 과학실에서 유리가 깨졌을 때 소연이를 위해 달려가는 진아는 여전히 착한 아이였으니까. 원래 진아가 가졌던 아름다운 마음씨까지 잃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아이들도 선생님의 말 앞에서는 쉽게 자신의 감점을 드러내지 못한다. 3학년 부회장을 맡았던 내내 부회장이라는 역할보다 큰 책임으로 힘겨워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참는 게 익숙했기에 아이가 불평할 때마다 선생님을 바꿀 수는 없으니 네가 참아라고 얘기했다. 열심히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는 아이에게 역설적이게도 네 감정을 숨기는데 최선을 다하는 '착한 아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눈 밖에 날까 진아 엄마처럼 학교에 찾아가 아이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해결하지 못한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그렇게 대를 이어 연명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참 편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아이들을 멋대로 판단해도 되니까. 소연이를 부탁할 때 담임 선생님도 내 어깨에 손을 댔다. 착하다면서. 36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애를 쓰고 있다면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언제든지 발병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최근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나답게 살기 위한 책들이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자리매김하는 것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하는 엄마가 없었다면, 장난꾸러기이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정우가 없었다면 진아는 여전히 홀로 모든 시간을 견디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아의 상황을 선생님께 편지로 전달해 준 정우의 용기에 박수와 갈채를. 오늘도 현명한 아이들에게 한 수 배운다.

 
일부러 세게 눌러야 다친 데가 확인될 만큼 살짝 베인 거였다. 상처는 그랬다. 그런데 왜 계속 아픈 기분일까. 아픈 데를 말하라고 하면 어디를 짚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몸뚱이 여기저기가 멍든 것처럼 아프다. 그냥 아프다. 꼭 꾀병처럼.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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