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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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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어떤 내용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싶을 땐 그 책이 재미있든 없든 다시 보고 판단해야지 생각만 하고 끝끝내 다시 보지 않는 게 나의 나쁜 습성이다. 어떻게 보면 스토리라인이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인데, <파묻힌 거인>에서의 상징성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고대 잉글랜드의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이 지나오는 길은 모두 안개로 뒤덮여 있고, 그 안개는 안개 속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마저 모두 흐릿하게 만든다. 색슨족과 브리튼족은 각자의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브리튼족인 그들은 여정 길에 색슨족 기사와 소년을 만나 여러 가지 사건에 휩쓸린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들의 아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굳히며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상징을 떠나 비어트리스가 앞에 서고 액슬이 뒤에 가며 주고받는 말, '지금도 거기 있나요?', '지금도 여기 있어요.' 가 좋았다. 그들은 도깨비가 나타날지 모르는 대평원에서, 어떤 괴물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깜깜한 동굴에서 서로를 확인한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느냐고.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더듬는 어떤 말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말들보다 지금도 그 자리에, 곁에 있느냐고 묻는 그 말이 마음을 울렸다. 

 

사랑했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사랑에는 기쁨만 있지는 않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증오해야만 했던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미래판 설정으로 본다면 영화 <이터널선샤인>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터널선샤인>에서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어도 사랑했던 흔적과 습관이 남아 사랑했던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쩌면 삶은 '몇 번이라도 다시!' 살아볼 만 할지 모른다. 그런데 <파묻힌 거인>에서는 그 사랑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어쨌든 '헤어짐'이어야 했기에. 서로를 어떻게 사랑했든 삶의 유한성의 숙명을 타고난 인간인 이상 영원한 헤어짐을 피할 수 없다. 

 

"섬에 가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요, 공주." 그가 말한다.

"그렇게 해요, 액슬. 이제 안개도 사라졌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뱃사공은 아직 물속에 서 있어요."

"그래요, 공주. 이제 내가 가서 그와 화해할게요."

"그럼 잘 가요, 액슬."

"잘 가요, 내 하나의 진정한 사랑."

그가 물속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게 말을 걸어올까? 그는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섰을 때 그는 내 쪽을 보지 않고 다만 육지 쪽을, 작은 만에 지고 있는 석양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눈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 그는 내 곁을 지나 계속 물속을 헤치고 가며 뒤돌아보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날 기다려요, 선생. 내가 조용히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고 그는 계속 물속을 헤치며 간다. -475p

 

공유하지 못할 사랑했던 기억을 끌어안고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 발붙이고 혼자 남은 여정을 계속하는 것. 온힘을 다해 안아주고 잘가라고 인사해 주는 것. 그 자체가 기억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의 삶이라는 게, 관계라는 게 거머리처럼 들러 붙는 꼬마 악당들을 끝없이 물리쳐야 하는 진창일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작가는 현실적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덧, 색슨 족 전사인 위스턴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목숨을 노리는 브레누스 경에 대해선 이런 말을 한다.

 

그 후 나는 그를 떠났고, 에드윈,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일이 일어났지. -328p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색슨 족과 브리튼 족의 관계이면서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총을 겨누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색슨 족과 브리튼 족의 이야기는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IS와 서구 문명 사이 전쟁의 핵심을 담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는 만만한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IS는 이라크전에서 미군에 맞서며 조직화됐다. 끔찍했던 학살의 기억-아무리 덮고 또 덮고 묻어보려 해도-은 사라지지 않고 더 큰 폭력을 낳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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