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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엄밀히 따지자면 제 첫번째 프랑스 추리소설은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가 아닙니다. 그 유명한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셜록 홈즈와 더불어 아르센 뤼팡은 당연 특별대우를 해줘야만 할 것 같아서 논외로 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성지와도 같아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로 인해 자연스레 경로우대하듯 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아무튼 원로급 작품에 대해 요즘의 소설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니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래서 이 소설이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유일한 프랑스 추리소설이 될 터이니 마담 알렉스여, 봉쥬르.

 

 

    최근들어 유럽의 미스터리소설, 그 중에서도 북유럽 지역의 소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그래서 꽤 많은 유럽소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추리소설은 같은 유럽 대륙의 소설이라 하여 한대 묶어놓기가 애매해 보입니다. 굳이 범죄를 다룬 소설이라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프랑스 소설에서는 파리 특유의 진동하는 하수구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온갖 종류의 병균을 지니고 있을 법한 팔뚝만한 크기의 쥐가 어딘가 흑사병을 옮기려는 듯 붉은 색의 두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찍찍 소리를 낸 후 축축하고 끈적한 하수구 물기에 발을 담그려는 것 같은 느낌의 냄새 말입니다.



    사건에 대한 묘사나 인물에 대한 설명에 대해 비교해보자면 북유럽의 소설은 꽁꽁 얼려놓았던 칼로 무언가를 스윽 베는 느낌이 납니다. 그것은 굉장히 차가운 감각이라 순간적으로 시원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또 스스로가 무언가에 베였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반면 프랑스 소설은 불로 달구어진 칼의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칼을 짧은 시간에 슥삭 해치울 생각으로 강하게 휘두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날을 세워 지긋이 힘을 주어 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부위로 인해 생긴 상처로 핏물이 스며들 때 바로 뜨거운 날붙이로 인해 지저져 상처가 강제로 아물게하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처와 고통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고마워해야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북유럽 소설과 프랑스 소설의 느낌차이는 지정학적인 위치차이 때문에 차갑고 뜨거운 간격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알렉스』는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큰 이야기는 하나의 반전을 이루고 있어서 장면과 상황이 극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각 장 안의 짧은 장면들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어찌보면 이런 장면의 전환이 참으로 불친절하게 보입니다. 나는 나대로 갈테니 따라올테면 따라와보라는 식의 전개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 헨델과 그레텔의 빵부스러기처럼 추리할만한 요소를 심어놓고 독자들이 흘려놓은 단서를 발견하고 따라가는 달콤한 맛을 선사하고 있는데 반해 이 소설은 철저하게 독자를 소설 밖으로 밀어내고 추리해볼만한 것따위를 던져주고 있지 않습니다. 추리할 것이 없는 추리소설, 처음에는 이런 느낌의 소설이 무척 싫었습니다만 소설을 읽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은근히 이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미묘하지만 일단은 다행이었습니다.



살인마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전에 반전, 그리고 또 그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프랑스 추리소설.



    소설의 불친절함은 소설 속의 주인공 카미유와 무척 닮아 있습니다. 그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독신남 형사로,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개인적인 상처와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인물입니다. 프렌치코트같은 느낌이 나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프렌치코트는 카미유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시종일관 츤츤한 카미유의 삐딱한 시선이 소설의 맛을 살짝 더 고급의 그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작가 스스로가 갖고 있을 법한 고정관념에 따라 가끔 소설속에서 차갑게 드러난 부분들이 있는데, 카미유와 캐릭터가 겹치는 듯해 보여서 차라리 카미유의 입을 빌려서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각 나라의 다양한 소설을 읽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소설의 맛을 음미한 뒤 이렇게 소문난 맛집을 소개하듯 사방팔방 알리는 것도 저에겐 즐거운 일입니다. 『알렉스』를 통해 프랑스 추리소설이라는 요리의 맛을 느껴보았습니다. 이건 뭐랄까, 나쁘지 않은 맛인데 문화적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했던 요리에서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맛의 요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 요리가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더 먹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메뉴 개척의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그가 또 다시 그녀를 후려갈기지 않게 하려면 아주 빨리 알몸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몸 위에 남아 있는 옷가지 모두를 재빠르게 벗는다. 그리하여 결국 알몸으로 그 앞에 선다. 그녀는 팔뚝으로 몸을 가려보지만, 이 순간, 자기가 모든 것을 잃었으며, 이런 상실감이 언제까지도 아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녀의 이 참담한 몰락은 절대적이다. 되도록 빨리 옷을 벗어던지면서 그녀는 무엇이든 응하고 말았으며, 모든 요구에 "네"라고 답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방금 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또 다시 자신의 감각이 아득해져가는 걸 느낀다. 마치 자기 몸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녀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난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시는게…… 뭔가요?" (52쪽)



    그녀는 울면서 웃는다. 그녀로서는 아직 살아 있어서 행복한 건지 혹은 여전히 알렉스로 남아 있어 불행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247쪽)



    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해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283쪽)



    자기 습관에 대한 집착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개인적인 의식의 수행이 된다. 그것은 카미유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산다는 건 크고 작은 의식들을 끊임없이 거행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의 접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298쪽)



    자기 자신의 실상과 정확히 마주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노릇일지도 모른다. (387쪽)



    진실이라, 진실이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반장님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528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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