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Go!! 이나중 탁구부 10 - 완전판, 완결
후루야 미노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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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중탁구부라는 작품에 있는 마이리뷰들이 다 이리 회의적이고 그저그랬어 식의 리뷰들인것에 놀라(청소년들에게 해가 될것이라는 내용까지!) 감히 자판을 두드려본다.

재미, 엽기 등등을 넘어서 나는 주인공들의 행동이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중학교때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하던지 혹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었나? 심한 장난부터 해서 성에 대한 환상, 호기심, 친구간의 관계..오히려 우리가 '틀'이라는 것에 알게모르게 얽매이고 당연히 안해야하는것으로 어느새 인식해서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이들이 해준것에 선구자 정신마저 느꼈다면 오버인가.

더욱이 이들은 너무 순진하다. 그저 우리가 당연시했던 그런 틀과 구속을 모르는 자유로운 아이들일뿐, 그런 틀마저 모르는 순진한. 마에노와 이자와가 변태인가? 누군가는 다분히 동성애적 코드를 읽었다고 하지만, 친한 친구간의 수많은 감정중의 하나가 부자연스럽다고 누가 할 수 있겠나. 오히려 그러한 어떠한 감정을 동성애적 코드라는 틀에 가둔 이의 틀이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러울 따름이다.

그저 중학생들의 철없으면서도 순수한 학교 혹은 동아리 생활을 다룬게 이나중이다. 작가는 탁구라는 하나의 소재를 통해, 그러한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표현한게 아닐까. 사람들이 변태만화라고 여기게 하는 에피소드나 소재들은 그저 하나의 '소품'일뿐이다. 그러한 소품하나하나는 역겹고 이상할지라도 그러한 소품들이 모여서 보여주는 탁구부 아이들은 결코 미워하거나 혐오할수없다. 여담이지만 후루야 미노루처럼 작은 감정의 흐름하나하나를 에피소드와 얼굴묘사를 통해 잘 전달해주는 만화가도 없지않나싶다. 그가 전해주고픈건 처음부터 탁구부 이야기가 아니라 틀에 얽매이지않는, 틀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을테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잘 먹혀들었다, 나같은 독자들에게는.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오히려 우리속의 자유로운 이자와, 마에노 들을 잊어버리고 정말이지 재미없고 뻔한 사람이 되어간다. 변태만화, 해로운 만화라고 치부해버리는 당신, 당신은 지금, 그러한 재미없고 꽉막힌 사람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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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10-2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안녕하세요.. 저도 존경해 마지 않는 작가라서 초면에 추천과 코멘트를^^... 예전에 읽으며 권수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어요. 게다가 이나중 탁구부가 처녀작이라는 데서 또한번 놀라게 되죠. 대단히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해요. 머릿속이 궁금할 만큼 말이죠. 이후의 작품들도 하나같이 뛰어납니다. 특히 저는 <그린힐>과 <두더지>를 좋아해요..
 
세탁소
모리 준이치 지음, 한유희 옮김 / 지원북클럽(하얀풍차)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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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나서 읽기에는 부담없다. 사실 우리나라에 정식배급되지 않은 영화(과연 극장서 볼수 있을지.)이기에 dvd,ost 등 어떤 부가물도 구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는 나같은 이들에게는 영화를 다시금 떠올릴수 있는 매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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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윤택림 지음 / 역사비평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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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을 다 읽은건 엄밀히 아니다. 총 3부, 10장의 책 중에 내가 읽은 챕터는 반정도이고 나머지는 띄엄띄엄 또는 아예 건너뛰며 읽었기에 말이다. 무엇보다도 쉽지않은 책이였다. 흥미는 있었으나 사전지식이 없던 나에게는 전문적 내용은 부담이기도. 하지만 친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사고가 조금 넓어진 기분이다.

나는 대학생활을 하며 학생들의 소위'운동권'을 보아왔고 간혹 참여도 해보았다. 물론 지배적 계층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쓰여진 우리나라의 역사, 현실 개탄할만하다.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를 보자. 우리와 가장 밀접한, 해방후 근대사중에 독재정권의 폐해가 얼마나 나와있는가. 현재 사회가 과연 얼마나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는가.

그런데 말이다, 대학생들의 시위,데모로 대표되는 그것에도 불만이 있던거다. 그들은-물론 나도 포함되었겠지- 통일을 부르짖고 반미를 외치며 총선때는 반이회창을 외치었다.(학생운동에는 다양한 성격이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주체가 되었다.) 순수한 그들 자의식의 발로이다. 좋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민중들의 삶속에는 그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대학생 자식들 또 데모하는구만.' 이런 반응이 많다. 왜 민중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학생운동이 그렇게 괴리되어있는가. 답은 이 책의 3장에 나와있다.

문제는 두 진리체제-국가의 공식적 담론과 민중사로 대변되는 대항담론-가 그 안에 다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획일적 담론구조를 가지고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진리체제가 낳은 담론적 획일화 속에서 실제적인 지방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두 진리체제 사이의 담론적 경합 속에서 지방민의 사적인 기억을 위한 장소는 어디 있는가. 공장노동자와 농민들의 사적인 삶의 경험은 얼마나 그들 속에 반영되어있는가... 그것은 누구의 역사인가. 대항담론은 성이라는 요인을 포함하는가.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적 국가의 이중 억압하에 있는 한국여성은 누가 대변하는가. 이것이 민중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대항담론을 대변하는 민중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요구하는 질문들이다

그동안의 내 궁금증을 어느정도 풀어주는 구문. 한민족도 좋고 평화를 위한 반미도 좋지만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간이 이리저리 치이는 모습은 싫다. 인간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주가되는 주객전도 현상처럼 무서운게 어디있는가. 이데올로기가 부수적인 방법이나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가되어버린게 전쟁과 같은, 우리 인간 역사의 추한 모습이다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이다.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기에 앞서 과연 자신들역시 획일적인 구조속에서 민중중의 일부분만을 대변하고 있지않은가 반성해야 하지않을까? 저자가 이 책을 쓴것도 지방민, 여성과 같은 주변인속의 역사를 찾아내기 위해서일것이다. 전에 말했듯이 그게 대표적 역사가 될수 있느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다리가 되기 위해서일것이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저자가 쓴 도구는 구술사, 생애사라는 새로운 개념이었고 결과는 만족스럽다.

인류학자는 -적어도 윤택림같은 분은- 이데올로기에 휩쓸려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들속에서, 그들연구의 주체는 인간일테니 말이다. :) 새로운, 만족스러운 책이였다. 학문의 맛을, 그러니까 소위 '어려운책'의 묘미를 처음 느껴본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나중에 기회가 있을때, 다시 한번 읽고싶어질때는 제대로 읽지않은 나머지 반 정도도 마저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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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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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래, 분명 독특한 책임은 틀림없다. 독특한 작가, 독특한 소재, 독특한 주인공, 독특한 전개. 처음 만난 파트리크 쥐스킨트씨는 독특했다. 근데 말이다, 그뿐이었다. 새롭게 접하는 호기심, 흥미 외에는 그. 다. 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거슬렸다, 불편했다, 킁킁거리는 그루누이는 아니 킁킁거리는 쥐스킨트는 내내 불편하고 찌푸려졌다.

문체나 몰입이나 그러한 정도를 떠나 소설에서 중요한건 작가가 생각한바, 그게 꼭 책전체의 거창한 주제 같은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이런거구나.' 하고 느낄수 있을때라 생각해 난. 그러니까 책을 읽다가 작가의 숨결, 마치 옆에서 작가가 사각거리며 펜을 놀리며 글을 쓰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씩 웃어주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아니면 작가가 직접 바라보지 않고 글에만 몰입하더라도 어깨 너머로 내가 바라보고는 응응 거릴수 있는. (직접 말을 하건 말건은 중요치않겠지.)

책 읽는 동안 내내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그르누이에 겹쳐 옆에 있었다. 전혀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가끔 킁킁거릴뿐이였다. 그의 잔뜩 웅크린 어깨 너머로 바라본 이야기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아니 냄새는 나지 않았다. 파트리크는 냄새가 나지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향수를 뿌려대었다. 자신이 만든. 아무리 향수를 뿌려 그것으로 나를 매혹시킬지언정 그의 숨결은, 그의 사각거림은 불편하고 어떤 흥미로움을 주지못했다.

파트리크는 370여쪽의 책에 그의 자주빛 성을 마음껏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심장속에서는 한껏 빛나는 자주빛성이였겠지만 나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결핍된, 자신만의 성안에서 고립되어 있는 이었을뿐이였다.

그르누이가 다른사람속에서 눈에 띄게 하지 않게 하는 향수를 뿌리건말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에 더욱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거쳐간 모든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순한, 하지만 상투적이고 일관된 형을 선고한 파트리크는 참을수없었다. 향기를 찾아 25명의 여인들을 죽이면서 그르누이의 만족감 외에 묘사하지 않은 작가는 참을 수 없었다. 아, 리쉬가 있었다고? 마지막 리쉬마저 향수로 매혹시켜 '나의 아들아.'라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파트리크씨에게 주먹을 한대 날려주고 싶었다.

'그는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었다.'(374페이지)

이런 그르누이를 역시 간단하게 사람고기로 만들어버려 먹어버린 작가. 정말이지..다른 모든것을 떠나 인간 파트리크 쥐스킨트 씨가 혐오스럽다. 수많은 찬사와 독자리뷰를 보면서도 난 이해할수가 없다. 옮긴이가 말한 소재의 특이성, 18세기의 풍속도를 보는듯한 즐거움, 치밀한 문장력,,,이 요소들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나에겐.

파트리크 쥐스킨트 씨, 당신은 뭘 말하려 한건가요? 당신의 사진과 사람에 대한 편력에 관한 책표지의 소개글을 읽고 지례 선입견을 가졌다면 미안합니다. 어쩌면 내안의, 사람의 마음속에 아주조금씩이라도 있을 그 근본적인, 원초적인 감정에 자격지심과 같은 느낌을 느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중에 조금이해할수있다면 더 드리겠지만 우선은 별 5개 만점에 마이너스 별 2개를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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