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1~8 세트 - 전8권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의천도룡기』두텁게 읽기


『의천도룡기』8권이 출간됨으로써 ‘사조삼부곡’ 24권이 완간되었다. 이전의 ‘영웅문’ 시리즈 18권이 원문의 약 70% 정도로 번역된 반면, 이번 ‘사조삼부곡’은 완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주인공 장무기는『사조영웅전』의 유가적 협객인 곽정과『신조협려』의 도가적 협객인 양과와는 다른 불가적인 협객이라 할 수 있다. 곽정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대협’을 지향하는 인물이고 양과가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추구하는 형상이라면, 장무기는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기억하며 심지어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융은 다른 소설에서 협객의 의미에서 벗어난 비협(非俠)의 경지(『연성결』의 적운)를 보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무술도 할 줄 모르고 협의와는 거리가 먼 반협(反俠)의 인물형상(『녹정기』의 위소보)도 창조했다. 그는 ‘삼류’라고 폄하되는 무협 장르에서 유사한 인물을 중복하여 창조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진융 소설이 그러하듯이『의천도룡기』도 여러 층위에서 읽을 수 있는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다. 기어츠(Clifford Geertz)는 인류학의 민족지(ethnography) 작업의 방법론으로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을 제시했다. ‘두터운 텍스트’는 민족지 작업이 가능한 텍스트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두텁게 읽기’는 진융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우선 진융의 소설을 ‘역사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사조삼부곡’을 통해 송(宋)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익힐 수 있다.『사조영웅전』은 칭기즈 칸의 흥기 과정과 금의 멸망 과정을 보여주고,『신조협려』는 양양(襄陽)성 전투를 통해 원이 송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배경으로 삼았으며,『의천도룡기』는 원 쇠퇴기에서 시작해서 명 건국까지의 과정을 파란만장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의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의천도룡기』에서도 주인공 장무기는 역사인물들과 조우한다. 훗날 명 태조가 되는 주원장과 항원 투쟁의 선봉장인 서달`상우춘 등이 그들이다. 진융이 역사를 가져오는 방식은 단순하게 시간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 인물을 등장시켜 소설 속 인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만든다. 바꿔 말하면 허구의 주인공들을 실제 역사 사건에 편입시키고 역사 인물들을 허구와 연계시킨다. 진융은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역사소설의 품위와 무협소설의 재미를 겸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소설에서는 원나라를 극복 대상으로 그렸지만, 13세기 ‘세계체계(world system)’는 ‘팍스 몽골리카’였다. 항원 투쟁은 오늘날 ‘팍스 시니카’의 입장에서 보면 소탐대실이었던 셈이다. 중국 내 한족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세계체계 내 대중화(大中華)의 패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사조삼부곡’ 시기의 진융은 훗날『천룡팔부』나『녹정기』에서 보여주는 ‘오족공화(五族共和)’, 즉 ‘중화민족 대가정’의 인식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몽고족과 거란족을 이민족으로 간주해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다음으로 이 소설은 ‘욕망과 집념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소설에는 저마다의 욕망을 가진 수많은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 내 모든 사단의 주모자인 성곤과 장무기의 의부인 사손은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성곤은 사랑하던 여인을 빼앗긴 복수를 위해, 사손은 가족을 잃은 복수를 위해 일생을 바친다. 또한 명교에 대한 멸절사태의 복수심, 장무기에 대한 조민의 적극적인 일편단심, 주지약에 대한 송청서의 집착과 기효부에 대한 은리정의 연연불망(戀戀不忘) 등은 인간의 속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특히 어려서 장무기에게 물린 기억을 평생 잊지 않고 그를 찾아다니는 아리는 장무기 본인을 확인한 후에도 기억 속의 장무기를 찾아 떠난다. 정신분석학적 분석이 필요한 인물이다. 아울러 명나라를 세워 황제 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정치적 욕망도 주목의 대상이다. 그는 민간에서 명교에 들어가 세력을 쌓고 자신의 상관들을 권모술수로 처리해서 최고 지위에 오른다. 우리는 그를 통해 저급하고 추악한 정치 드라마의 속성을 볼 수 있다. 주원장의 형상은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될 수 없다(無毒不丈夫)’는 속담의 진수를 보여준다.

셋째,『의천도룡기』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착하지만 병약했던 아이가 험난한 시련을 거쳐 명교의 교주이자 무림지존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장무기의 개성을 파악하는 키워드는 ‘부드러움(柔)’이다. 그는 순리를 따르며 자비를 베풀며 살지만, 그의 부드러움은 유약(柔弱)하지 않고 외유내강(外柔內剛)하다. 그러기에 기효부의 딸 양불회를 아버지 양소에게 데려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한 편이다. 그는 마지막에 조민과 결합하면서도 주지약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아소와 아리를 잊지 못한다.

장무기의 성장 과정에서도 기연은 등장한다. 다른 무협소설과 달리, 진융은 인물의 성격에서 오는 필연적 요소와 세밀한 디테일 묘사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우연성을 극복하고 있다. 영화 촬영 기법을 활용한 디테일 묘사는 독자들에게 생동한 명장면들을 선사한다. 21장의 광명정 전투, 24장의 무당산 삼청전의 전투, 그리고 36장의 소림사 세 고승과의 대결은 그 대표적인 예다.

넷째, ‘강호라는 가상 세계에 관한 이야기’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이는 무협소설의 요체다. 텍스트에서 강호인들은 도룡도와 의천검을 얻으려고 혈안이다. 나중에 밝혀지는 비밀에 의하면, 곽정이 만들었다는 한 쌍의 도검 속에는 각각 악비(岳飛)의 병서와 구음진경이 들어 있었다. 사손은 도룡도를 손에 넣기 위해 수 십 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빙화도로 떠나고, 장무기의 부모는 사손과의 의리와 도룡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강호인치고 도룡도와 의천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보인다. 진융이 그려낸 강호는 소림`무당`아미`화산`곤륜`공동의 육대문파와 명교로 대변되는 정과 사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진융은 이들을 변화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정파에도 악인이 있을 수 있고 사파에도 선인이 있을 수 있으며, ‘정이 사가 될 수 있고 사 또한 정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잊지 않는다.

이상이 텍스트 전체에 걸친 이야기라면,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어가 보자.

장무기가 익힌 무공은 ‘무공의 개성화와 문화화’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그가 구양진경, 건곤대나이, 태극권`태극검 등 최고의 무공을 연마하는 과정은 가히 ‘전기적(傳奇的: romantic)’이라 할 수 있지만, 진융은 그 과정을 개성화하고 문화화한다. 그는 남들이 평생 걸려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건곤대나이를 구양진경의 내공에 힘입어 몇 시간 만에 마스터하는 과정에서 과욕을 부리지 않는 개성을 드러낸다. 또한 태극검은 장무기의 부드러움과 잘 어울리는 무공인 동시에 ‘마음으로 검을 부리는’ ‘이의어검(以意馭劍)’의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초식보다 검의(劍意)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무공은 문화로 바뀐다.

진융의 소설은 중국 전통문화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문화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연속성이라는 면에서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 13경으로 대표되는 철학, 25사의 역사, 당시(唐詩)와 명청 소설 등의 문학, 그리고 서화(書畵), 바둑, 음악, 의술, 다도(茶道)와 주도(酒道) 그리고 음식 등의 전통문화는 우리의 섣부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국의 문화 전체가 진융의 소설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지만, 그것이 중국 문화 입문에 유용한 경로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배화교라 일컬어지는 조로아스터교의 중국 전래와 발전 상황에 관한 종교 문화와 의술에 관한 정보가 두드러진다. 진융은 이들 정보를 계몽적으로 훈시하지 않고 ‘즐거움 가운데 가르침을 얹는’(寓敎於樂)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진융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연스레 중국 문화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중국인의 어떤 특성’(some Chineseness)을 체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진융의 소설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두 날개의 문학사’를 체현하고 있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는 ‘문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번 번역은 3판 개정본에 의거했는데, 이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조건이 되면 끊임없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작가의 본분’(11월 2일, 진융 인터뷰)이라는 작가 자신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손을 떠나며 시작되는 텍스트의 여행’이라는 수용미학의 입장에서 보면, 3판 개정본의 시도는 화사첨족의 우를 범한 듯 보인다. 그동안 진행된 비평과 연구를 무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 오족공화: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가운데 민족주의의 요체. 처음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이었지만 후에 ‘오족공화(五族共和)’로 바꾸었다. 이는 한(漢)족과 만(滿)·몽(蒙) ·회(回)·장(藏)의 5대 종족이 중국을 구성하는 종족임을 동등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구체적 정책으로 대외적으로는 민족 해방을 제창하고, 대내적으로는 중국 내의 각 종족의 평등을 추구했다.

* 『구양진경』: 범어로 된『능가경』행간에 어느 고승이 한문으로 써놓은 것으로, 내공을 단련하는 고도의 무학비결이 담겨있다. 기본 원리는 구양(九陽)을 혼합하여 일원(一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 건곤대나이: 페르시아 명교에서 창안했다는 무공 심법(心法). 근본 도리는 사람의 잠재력을 격발시켜 커다란 힘을 발휘케 하는 것이다. 주인공 장무기는『구양진경』으로 익힌 내공을 건곤대나이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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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소돔과 고모라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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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소돔과 고모라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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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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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1~8 세트 - 전8권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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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8권이 출간됨으로써 ‘사조삼부곡’ 24권이 완간되었다. 이전의 ‘영웅문’ 시리즈 18권이 원문의 약 70% 정도로 번역된 반면, 이번 ‘사조삼부곡’은 완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주인공 장무기는『사조영웅전』의 유가적 협객인 곽정과『신조협려』의 도가적 협객인 양과와는 다른 불가적인 협객이라 할 수 있다. 곽정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대협’을 지향하는 인물이고 양과가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추구하는 형상이라면, 장무기는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기억하며 심지어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융은 다른 소설에서 협객의 의미에서 벗어난 비협(非俠)의 경지(『연성결』의 적운)를 보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무술도 할 줄 모르고 협의와는 거리가 먼 반협(反俠)의 인물형상(『녹정기』의 위소보)도 창조했다. 그는 ‘삼류’라고 폄하되는 무협 장르에서 유사한 인물을 중복하여 창조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진융 소설이 그러하듯이『의천도룡기』도 여러 층위에서 읽을 수 있는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다. 기어츠(Clifford Geertz)는 인류학의 민족지(ethnography) 작업의 방법론으로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을 제시했다. ‘두터운 텍스트’는 민족지 작업이 가능한 텍스트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두텁게 읽기’는 진융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것이다.

우선 진융의 소설을 ‘역사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사조삼부곡’을 통해 송(宋)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익힐 수 있다.『사조영웅전』은 칭기즈 칸의 흥기 과정과 금의 멸망 과정을 보여주고,『신조협려』는 양양(襄陽)성 전투를 통해 원이 송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배경으로 삼았으며,『의천도룡기』는 원 쇠퇴기에서 시작해서 명 건국까지의 과정을 파란만장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의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의천도룡기』에서도 주인공 장무기는 역사인물들과 조우한다. 훗날 명 태조가 되는 주원장과 항원 투쟁의 선봉장인 서달`상우춘 등이 그들이다. 진융이 역사를 가져오는 방식은 단순하게 시간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 인물을 등장시켜 소설 속 인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만든다. 바꿔 말하면 허구의 주인공들을 실제 역사 사건에 편입시키고 역사 인물들을 허구와 연계시킨다. 진융은 역사와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역사소설의 품위와 무협소설의 재미를 겸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소설에서는 원나라를 극복 대상으로 그렸지만, 13세기 ‘세계체계(world system)’는 ‘팍스 몽골리카’였다. 항원 투쟁은 오늘날 ‘팍스 시니카’의 입장에서 보면 소탐대실이었던 셈이다. 중국 내 한족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세계체계 내 대중화(大中華)의 패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사조삼부곡’ 시기의 진융은 훗날『천룡팔부』나『녹정기』에서 보여주는 ‘오족공화(五族共和)’, 즉 ‘중화민족 대가정’의 인식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몽고족과 거란족을 이민족으로 간주해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다음으로 이 소설은 ‘욕망과 집념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소설에는 저마다의 욕망을 가진 수많은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소설 내 모든 사단의 주모자인 성곤과 장무기의 의부인 사손은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성곤은 사랑하던 여인을 빼앗긴 복수를 위해, 사손은 가족을 잃은 복수를 위해 일생을 바친다. 또한 명교에 대한 멸절사태의 복수심, 장무기에 대한 조민의 적극적인 일편단심, 주지약에 대한 송청서의 집착과 기효부에 대한 은리정의 연연불망(戀戀不忘) 등은 인간의 속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특히 어려서 장무기에게 물린 기억을 평생 잊지 않고 그를 찾아다니는 아리는 장무기 본인을 확인한 후에도 기억 속의 장무기를 찾아 떠난다. 정신분석학적 분석이 필요한 인물이다. 아울러 명나라를 세워 황제 자리에 오른 주원장의 정치적 욕망도 주목의 대상이다. 그는 민간에서 명교에 들어가 세력을 쌓고 자신의 상관들을 권모술수로 처리해서 최고 지위에 오른다. 우리는 그를 통해 저급하고 추악한 정치 드라마의 속성을 볼 수 있다. 주원장의 형상은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될 수 없다(無毒不丈夫)’1)는 속담의 진수를 보여준다.

셋째,『의천도룡기』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착하지만 병약했던 아이가 험난한 시련을 거쳐 명교의 교주이자 무림지존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장무기의 개성을 파악하는 키워드는 ‘부드러움(柔)’이다. 그는 순리를 따르며 자비를 베풀며 살지만, 그의 부드러움은 유약(柔弱)하지 않고 외유내강(外柔內剛)하다. 그러기에 기효부의 딸 양불회를 아버지 양소에게 데려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한 편이다. 그는 마지막에 조민과 결합하면서도 주지약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아소와 아리를 잊지 못한다.

장무기의 성장 과정에서도 기연은 등장한다. 다른 무협소설과 달리, 진융은 인물의 성격에서 오는 필연적 요소와 세밀한 디테일 묘사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우연성을 극복하고 있다. 영화 촬영 기법을 활용한 디테일 묘사는 독자들에게 생동한 명장면들을 선사한다. 21장의 광명정 전투, 24장의 무당산 삼청전의 전투, 그리고 36장의 소림사 세 고승과의 대결은 그 대표적인 예다.

넷째, ‘강호라는 가상 세계에 관한 이야기’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이는 무협소설의 요체다. 텍스트에서 강호인들은 도룡도와 의천검을 얻으려고 혈안이다. 나중에 밝혀지는 비밀에 의하면, 곽정이 만들었다는 한 쌍의 도검 속에는 각각 악비(岳飛)의 병서와 구음진경이 들어 있었다. 사손은 도룡도를 손에 넣기 위해 수 십 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빙화도로 떠나고, 장무기의 부모는 사손과의 의리와 도룡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강호인치고 도룡도와 의천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보인다. 진융이 그려낸 강호는 소림`무당`아미`화산`곤륜`공동의 육대문파와 명교로 대변되는 정과 사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진융은 이들을 변화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정파에도 악인이 있을 수 있고 사파에도 선인이 있을 수 있으며, ‘정이 사가 될 수 있고 사 또한 정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잊지 않는다.

이상이 텍스트 전체에 걸친 이야기라면,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어가 보자.

장무기가 익힌 무공은 ‘무공의 개성화와 문화화’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그가 구양진경, 건곤대나이, 태극권`태극검 등 최고의 무공을 연마하는 과정은 가히 ‘전기적(傳奇的: romantic)’이라 할 수 있지만, 진융은 그 과정을 개성화하고 문화화한다. 그는 남들이 평생 걸려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건곤대나이를 구양진경의 내공에 힘입어 몇 시간 만에 마스터하는 과정에서 과욕을 부리지 않는 개성을 드러낸다. 또한 태극검은 장무기의 부드러움과 잘 어울리는 무공인 동시에 ‘마음으로 검을 부리는’ ‘이의어검(以意馭劍)’의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초식보다 검의(劍意)2)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무공은 문화로 바뀐다.

진융의 소설은 중국 전통문화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문화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연속성이라는 면에서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 13경으로 대표되는 철학, 25사의 역사, 당시(唐詩)와 명청 소설 등의 문학, 그리고 서화(書畵), 바둑, 음악, 의술, 다도(茶道)와 주도(酒道) 그리고 음식 등의 전통문화는 우리의 섣부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국의 문화 전체가 진융의 소설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지만, 그것이 중국 문화 입문에 유용한 경로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배화교라 일컬어지는 조로아스터교의 중국 전래와 발전 상황에 관한 종교 문화와 의술에 관한 정보가 두드러진다. 진융은 이들 정보를 계몽적으로 훈시하지 않고 ‘즐거움 가운데 가르침을 얹는’(寓敎於樂)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진융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연스레 중국 문화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중국인의 어떤 특성’(some Chineseness)을 체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진융의 소설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두 날개의 문학사’를 체현하고 있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는 ‘문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번 번역은 3판 개정본에 의거했는데, 이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조건이 되면 끊임없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작가의 본분’(11월 2일, 진융 인터뷰)이라는 작가 자신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손을 떠나며 시작되는 텍스트의 여행’이라는 수용미학의 입장에서 보면, 3판 개정본의 시도는 화사첨족의 우를 범한 듯 보인다. 그동안 진행된 비평과 연구를 무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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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학사론
이청원 / 원광대학교출판국 / 198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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