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아 1호 - 창간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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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미스터리 잡지 출간을 환영합니다! 미스테리아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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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슬리피할로의 전설 펭귄클래식 132
워싱턴 어빙 지음, 권민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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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이야기꾼들의 세계

-슬리피 할로의 전설



마치 유럽 대륙으로 여행을 갔다가 어쩔 수 없는 방랑벽에 이끌려 벽지와 변두리와 곁길에서만 그림을 그린 어느 불운한 풍경 화가처럼 나 역시 그런 실망감을 안길까 걱정스럽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화가의 화첩에는 시골집과 풍경과 외딴 폐허만이 가득할 뿐,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콜로세움, 테르니 폭포나 나폴리 만 등은 등장하지 않으며, 빙하나 화산 등은 전 화첩을 뒤진다 해도 찾아볼 길 없다. (p.10 작가의 말)



  워싱턴 어빙?

  누구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이름이었지만 떠오르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슬리피 할로의 전설’이라는 표제는, 할로윈 데이의 으스스하면서도 유희적인 느낌을 연상시키는 표지와 함께, 무겁다고도 가볍다고도 할 수 없는 낯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펼쳐진 스스럼없는 작가의 말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자, 긴장 풀고!’라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파리의 에펠탑이나 로마의 신전을 구경하러 가는 길에 버스 옆좌석에 앉은 사람과 친해져서 그 사람 동네에 가서 술 한잔 얻어먹고 동네 사람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며칠씩 머무르는 그런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이상 이 책에 그렇게 큰 기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으나, 그건 반대로 그렇게 크게 실망할 위험이 사라졌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들은, 무슨 위대하고 거창한 모험담이 아니라 동네 호프집에 매일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아저씨의 소싯적 무용담 같은, 어디서 본 것 같고 만났던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는, 해가 점점 길어져서 아무리 늑장을 부리고 공원의 그늘을 어슬렁거려도 밤이 쉬 오지 않는 지금 같은 여름날에, 간단히 저녁을 때운 뒤에 생맥주 한 잔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옆에 놓고 뒤적이기 좋은 열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여기 실린 단편들을 크게 두 가지 조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는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또 어느 시대에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인 죽음, 실연이나, 시골의 장례풍습 등을 다룬 소박한 스케치들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전설, 역사적 사실이나 여행지에서의 체험을 저자의 기지와 상상력으로 풀어낸, ‘다시 쓴’ 이야기들이다.


 그는 자기 마음을 동하게 하고, 끌어당기고, 훈훈하게 덥혀주었던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썼다.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는 ‘세상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노인,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낙이었던 아들을 잃은 노모, 사랑 때문에 시들어 죽은 처녀들...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단편집 안에서 부유한 영주의 딸이나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거장들, 자기 민족을 위해 끝까지 투쟁한 인디언 영웅의 이야기와 똑같은 무게와 정취를 지니고 똑같이 사랑스럽게 이야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끌었던 이야기는 <립 밴 윙클>과 <포카노켓의 필립>, <슬리피 할로의 전설>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나는 이야기하고, 당신은 듣는다’라는, 이야기의 가장 순수한 속성에 충실한 단편들이다. 각각 미국의 독립 전쟁, 식민지 개척 초기 원주민들과의 전쟁, 독일 산간지방의 전설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단편들은, 그 소재나 배경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법한 어떠한 교훈이나 뚜렷한 문제의식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채, 단지 어디어디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러이러하게 살고 있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라는 서사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2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특유의 맛과 매력을 간직한 채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단편들에서 이야기꾼(화자)의 존재는 전면에 드러난다. 어빙은 이것이 (어디서 들은, 어디선가 본) ‘이야기’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 점이, 비슷한 류의 전설이나 역사적 일화를 다룬 다른 작가들과 구분되는 어빙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는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구호라도 외치듯이, 서두는 영감에 찬 시인들의 싯구로 장식하고 말미에는 (구태여 ‘추신’을 달아서라도)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의 시선(혹은 견해)’을 덧붙인다. 이러한 이중의 강조는, 현대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상호 텍스트성’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인 허구와 사실(넓게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독자의 사유를 자극시킨다.(실제로 나는 어빙을 읽는 내내 보르헤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이야기들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에, 딱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듯하지만 독자의 해석에 따라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라도 될 수 있으며, 작가 자신이 그러했듯, 이 이야기를 접한 또 다른 이의 펜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여지를 무한히 열어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결코 잊고 싶지 않은 장면 하나를 되새기며 두서없는 리뷰를 마친다.

  


  화자는 이야기를 끝낸 후 목을 축이려고 포도주 잔을 막 입에 가져가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무한한 존경심으로 질문자를 바라보더니, 이어 잔을 천천히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하길, 이 이야기가 더없이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바는 “우리가 농담을 있는 그대로 웃어넘길 수만 있다면, 인생의 모든 상황에는 나름대로의 이점이나 즐거움이 있지요. 따라서, 요괴 기병과 경주를 벌이는 자는 혼쭐 깨나 나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시골 선생의 경우 네덜란드계 상속녀에게 퇴짜 맞은 것은 높은 지위로 나아가는 일보가 되지요.”

  신중한 노신사는 이와 같은 삼단논법의 추론에 몹시 어리둥절하여 설명을 듣고 난 뒤 열 배는 더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동안 희끗희끗한 옷을 입은 노인은 (내 생각에) 의기양양한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노신사가 말하길, 다 좋다 쳐도 그의 이야기는 다소 얼토당토않은 면이 있다고, 의심쩍은 부분이 한두 군데 있다고 했다.

  “믿음이죠, 나리.” 화자가 대답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저 자신도 반쯤은 믿지 않는답니다.” (p.214~215 <슬리피 할로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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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펭귄클래식 123
프로스페르 메리메 지음, 송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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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이란 이름―무죄이자 유죄인

 

그걸 뭐라고 부르지? 한편으로는 결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죄인.

-장 뤽 고다르, 카르멘이란 이름(Prenom Carmen, 1983)

 

 

‘카르멘’이라는 이름은 낯익었으나 ‘메리메’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내가 ‘카르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의 일로, 음악선생님이 비제의 오페라를 언급했을 때였는데 그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다만, 아마도 외국 유학을 다녀왔을 가능성이 농후한 그 남자 선생님의 ‘카르멘’이라는 발음만이 지금까지도 뇌리 속에 생생하고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ㅋ’과 ‘ㄲ’ 사이 어딘가에 놓인 첫 음소로 시작해 ‘르’로 슬그머니 미끄러졌다가는 ‘멘’ 하고 짧게 끊어지는 그 낯설고도 관능적인 소리에 나는 묘한 매혹을 느꼈다. 나는 끊임없이 자라났고, 언젠가의 그 음악 시간은 잊혀졌으며 더 이상 누구도 내게 음악 따위를 가르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생물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소녀’가 아닌 ‘여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내가 ‘여자’라는 의식을 갖게 된 후로부터 나는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어쩌면 치명적이기까지 한 마성을 지닌 여성들을 흠모하게 되었고, 가능하다면 나도 그러한 여성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카르멘≫이라는 책을 만났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그 이유는 바로 내가 빠져들거나 열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여성을 곧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내가 실제로 마주친 것은 ‘카르멘’이라는 여인이 아니라 ‘메리메’라는 작가였다.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카르멘을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은 2부의 외양 묘사 몇 구절에서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호세라는 사랑에 미친 남성이 들려주는, 일종의 일화들 속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카르멘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장막에 비친 카르멘의 그림자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메리메라는 작가가 택한 서술방식의 효과였다면, 이 작가는 꽤 영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매혹적이거나 관능적으로 다가오는, 아슬아슬 위태롭게 춤추며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모두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무엇’이다. 낯설고, 예상을 빗나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어떤 단정적인 표현에서도 빠져나가며,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주체와 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매혹과 관능은 대상 자체에 내제된 속성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을 포착/파악/소유하려는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대상 사이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러므로 카르멘이라는 팜파탈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3자 혹은 관찰자의 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메리메는 1부에서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 고고학자인 화자를 등장시켜 나바로라는 도적을 만나게 하고, 2부에서 스치듯 베인 상처처럼 짧고도 강렬했던 카르멘과의 만남을 서술한 뒤, 호세 나바로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카르멘과의 일들을 옮겨 적는다. 이러한 구성은 ‘고고학자인 화자(나)’에서 ‘카르멘’으로 바로 직행하지 않고 ‘호세 나바로’라는 사랑에 빠진 인물을 경유해 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는 처음에는 화자인 고고학자를 따라, 다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호세 나바로의 이야기를 따라 카르멘이라는 잡히지 않는 야생동물을 추적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전개에서 오는 서스펜스와 함께 카르멘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체험한다. 작중화자가 제3의 인물(호세 나바로)을 묘사하고, 그 제3의 인물이 카르멘이라는 주인공을 형상화하는 2중의 구조를 택한 덕분에 작가는 이야기의 긴장과 캐릭터 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카르멘의 이야기’가 아니라 ‘카르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장막에 비친 그림자로 제시된 카르멘의 말과 행동을 볼 수 있을 뿐, 그리고 그 말에 숨은 의미나 행동의 동기를 유추할 뿐, 진짜 사건의 전말이나 카르멘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는 없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카르멘이라는 매혹적인 집시 여인이 아니라, 집시 여인이라는 매혹적인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우리가 취하는 태도,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호세 나바로와 카르멘의 사랑이야기(?)는 주체와 객체, 남자와 여자, 문명과 비문명, 선진국과 후진국, 중심과 바깥의 관계 등에 대한 은유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호세가 끝내 카르멘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대목은 곱씹어보면 무척 섬뜩하다. 타자를 파악하려 하고, 통제하려 하고, 우리의 질서에 편입시키려 하다가 실패할 때 우리가 취하는 마지막 행동이 그 타자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라니.

카르멘은 그저 한 인간이었다. 장막에 비친 그림자, 그러니까 호세 나바로라는 필터를 통해 그려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한 여성으로서 나는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뜨거운 인간이자, 세상의 몰이해와 핍박에 위악으로 맞섰고, 자신이 속한 민족과 문화 안에서 죽는 순간까지 당당했던 그녀의 삶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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