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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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어있다고. 


그것이 픽션이든 무엇이든 간에. 『외딴방』은 소설이지만 픽션이라고 보기 힘든 소설이었다. 


작가의 어린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10대였을 때, 먼 시골에서 큰오빠가 있는 서울로 외사촌과 함께 상경하여 산업체 특급 학생의 신분으로


긴 시간을 보낸다. 내가 느낀 그녀의 모습은, 조용하고 마음이 여리면서 고집 있다는 것이었다. 


우물안에 쇠고랑을 던지게끔 하였던 무언가를, 그녀는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부러웠다.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마음. 그 강한 이끌림.


두렵지 않았을까? 꺼내면 너무나도 아파서 글자 하나 하나 나열하기 조차 힘들었을 과거를 쓰는 것이.


친구와의 대화에서 드는 생각은 과연 내가 나의 이야기, 나의 치부를 꺼내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제대로 꺼낸 적 없던 나의 기억들과, 숨겨진 속마음과, 나약함들을. 비겁한 마음을. 




 그녀가 『외딴방』에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20년 정도라면, 나는 과연 얼마나 걸릴지. 


글의 형태로든 어떤 형태로든 내 가슴 깊이 묻혀 있는 나의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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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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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인가, 등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발 좀 자르라고 잔소리 하던 엄마의 말에도 아랑곳 않던 내가, 나의 긴 머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꼈던 때. 그때부터였나. 하루하루가 점점 무기력해진 것은. 



 한동안 미쳐있던 노래를 들어도 그저 그랬고, 좋다는 소설을 읽어도 그냥 그랬다. 
내가 인생을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지루함을 느낄까. 가장 파릇파릇해야 할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대체 왜. 아, 난 사실 이런 청춘의 단어들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혀 온다. 푸른 것, 새싹같은 것, 싱싱한 것. 가장 예쁘고 좋을 때. 분명 봄이라는데, 정작 나는 우악스럽게 내리는 빗속에서 장마가 끝나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에서 좋았던 것은, 계절이 여름이었다는 점이다. 눅눅하고 축축해서 힘이 쫙 빠지게 만드는 그런 날씨와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내 모습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다. 내 모습과 소설 속 '나'의 모습이 너무도 흡사해서.성격이나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무기력함이 '나'에게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바쁘게 무언가를 준비하며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뚝 떨어져나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약간의 열등감과, 약간의 패배감과, 약간의 질투심, 그보다 더한 무기력함에 지배 당하며 말이다. 


 가장 답답한 건, 내가 왜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호소할 만한 크나큰 아픔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좌절의 경험도 없는데.
아리송하면서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상태가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작품을 읽으면서 결말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요조가 PD시험을 보러갔을 때는 덜컥 붙어버릴까 내심 조마조마했고(떨어진 걸 알고 잠수탔을 땐 또 어디선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까 그것도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나에게 요조라는 이름은 자살과 너무 가깝다), 세 사람이 다시 합쳐 즐겁게 살아가면 그건 또 그것대로 석연치 않았을 것 같다. 조금 이기적이지만, 그들에게서 성공의 모습을 보면 또다시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짐이 가득 쌓인 방에서 요조를 발견했을 땐 크나큰 안도감과 함께 어딘가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의 성장이 성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좋았고, 각자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었다. 


 책에는 내가 느끼는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예쁘게 포장되지도 않았고 과하게 어둡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그것에 어울리는 결말, 그 속에 표류하는 여러 감정들을 느끼면서 함께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우울했던 날엔,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고립된 섬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홀로 남겨지는 게 무서워 부지런히 움직여봐도 정신차리면 제자리걸음이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요즈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나의 현실이, 나만의 현실은 아니라는 것. 분명히 나와 같이 느끼는 누군가가 또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깊은 위로를 받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작품 말미에 작가님께 고맙다는 말을 속으로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오늘 나는 머리를 싹둑 잘랐다.
미용실에 가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가끔 머리를 잘라주는 언니에게 조르고 졸라서.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모종의 쾌감과 함께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내친김에 염색까지 해서 지금은 가볍고 새로워진 머리를 살짝 흔들어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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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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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우물 필수적이라고 말할 있을 정도로우물 자주 등장한다. 노르웨이의 의 초반부에는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우물에 대해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 그녀는 내게 들판의 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우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안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나 기호였을지도 모른다. (중략)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경계선 바로 언저리에 있다. (중략)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구멍 안을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구멍이 무서울 정도로 깊다는 것뿐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구멍 안에는 암흑이 가득 찼다. -14



 나오코의 이야기를 와타나베가 듣고 상상한 우물이다. 그 우물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나오코의 말에 따르면, ‘우물’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존재이다. 어쩐지 블랙홀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우물의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자주 등장시키는 이 ‘우물’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선우물 일본어로 「井戸‧いど이다. 히라가나의 영문 표기는ido 것이다. 이처럼 우물발음에 주목하는 이유는 본능을 뜻하는id, 이드 발음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드 일본어로 발음을 하면  イド」 로, 우물의いど 발음이 같아진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Freud)는 인간의 정신이 세가지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가 그것이다. 그중 본능은 유전적인 특성을 포함하는 퍼스낼리티의 기초이며, 다른 두 가지 요인인 '자아(ego)'와 초자아(super ego)'는 이드(id)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드는 정신의 무의식적인 부분이고 생물학적인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쾌락원칙'하에서 기능하므로 본능을 만족시키고자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과 공격의 본능이 있는데, 성은 삶의 본능(에로스)을 나타내고 공격은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을 나타낸다고 한다. 때문에 자아가 성숙되지 못한 어린아이의 정신은 대부분 이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우물이드가 동일한, 혹은 비슷한 의미라면 결국 우물은 인간의 깊은 내면속 무의식이나 죽음 혹은 삶의 본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하루키가 이러한 점을 노리고우물 썼다고 단정짓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에는 가설을 입증할 만한 하루키의 생각이 등장한다.



그녀는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우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무엇이 바닥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가끔 우물에서 떠오르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는 거지.”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우물에 대해 생각했다. – 단편집 『TV 피플』의, 비행기 - 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는가」 본문 중.



 하루키의 단편소설 「飛行機」에는 우물이 마치 인간의 내면과 같다고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다. 무의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면은, 깊은 우물과도 같아 무엇이 바닥에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그저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형태로 어렴풋이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번째 인용문에서 와타나베가 짐작한 것처럼 우물, 특히 암흑에 가득찬 우물이란 나오코의 안에 존재한 이미지나 기호일 것이다. 다시 프로이트의 이드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자. ‘이드는 무의식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능을 말한다. 가장 원초적인 본능,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다. 나오코는 연인이었던 기즈키가 자살한 이후로 삶에 대한 욕구를 상실하고 만다. 프로이트는 삶의 본능이 성()으로 발현된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둘의 자살을 예고한 것일지도 모르는 내용이 작품의 본문에 나온다.



, 기즈키를 사랑했고, 그렇게 처녀성 같은 거에 집착하지도 않았어. 그가 하고 싶다면 난 뭐든 기쁜 마음으로 내주려고 했어. 그렇지만 안되었어.”(중략) “열리지 않았어, 전혀. 그래서 너무 아팠어. 메말라서 아팠던 거야. 온갖 방법으로 시도해 봤어, 우리. 그런데 무슨 짓을 해도 안 되었어. –본문, 196.



 오랜 시간 줄곧 함께하면서 사랑했던 기즈키와 나오코는 그러나, 한번도 정사를 나누지 못하였다.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없었던 나오코로 인해 기즈키가 죽기까지 둘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하였으나 결합되지 못한, 즉 삶의 길로 이어지지 못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게 되는 두사람의 미래, 혹은 운명을 암시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본질적으로 죽음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단 한번이지만 결합에 성공한다. 기즈키와는 불가능하였으나 와타나베와 가능했던 이유는, 와타나베는 본질적으로 죽음보다 에 더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즈키와는 달리 삶의 본능이 강한 와타나베를 만남으로써 잠시나마 나오코에게도 생에 대한 본능’, 성적 욕구가 생긴 것이었다.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자살한 후에 죽음을 보다 가깝게 느꼈고, 언제나 삶과 함께 공존함을 느꼈다. 그것은 나오코의 자살로 더욱 강한 느낌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러한 사실에 깊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가까이하면 죽게될지도 모르는 어두운 우물과 거리를 두듯이, 자신은 살아있고, 살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와타나베는 죽음과 삶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타던 인물이었다. 나오코와 미도리를 함께 만나며 생생한 삶과 맞닿은 죽음 사이에서 여러차례 방황을 한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486.



 자신이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는 채로 혼란스러워 하다가 마지막에는 미도리를 애타게 찾는다. 이로써 그의 방황도 끝나는 것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삶에 대한 본능을 따르게 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의 정신 대부분을 차지한 이드가, 외부의 접촉과 경험을 통해 자아를 키워나가고, 그것이 심화되어 초자아를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또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드와 초자아를 적절히 제어하고 활용하며 균형을 맞추는게 중요하다고 하였다. 열일곱 살에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하여 시간이 멈춰버린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삶. 와타나베는 죽음의 본능에 빠지지 않고 성숙한 자아를 위해 혹독한 성장통을 겪어냈으나, 나오코는 결국 외부세계와의 접촉에서 실패하고 죽음에 대한 본능, 즉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자신의 깊은 우물로 빠지고 만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각자의 내면에 있는 우물의 존재에 대해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라는 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처럼,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함께 존재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유한한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설령 그 길이 상실을 겪게되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마지막에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애타게 찾는 것을 보며, 덩달아 왈칵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것은 그들에게서 희망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참고문헌>


1.     [네이버 지식백과] 이드[id](사회학사전, 2000.10.30, 사회문화연구소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21106&cid=1137&categoryId=1137


2.     블로그. <해변의 카프카>로 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 http://blog.naver.com/PostView.nhn blogId=3644young&logNo=60084173468&parentCategoryNo=11&viewDate=¤tPage=1&listtype=0&from=post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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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0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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