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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그는 초국가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전쟁 말기의 극심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고 또한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에서 민주주의 이념과 자유 평화 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혼돈의 와중에서도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년 오에 겐자부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민주주의 헌법과 교육 기본법이었다. 거기에는 '개인'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개인인 너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평생을 관통하는 평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바로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내가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개인인 너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밖에 그가 노벨수상작가라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조국이 전범국가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의 일환으로 '일본은 국제 평화를 희구하고 영구히 국제적인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고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네이버 지식백과 사전)'는 내용의 헌법9조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천황제와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고수하며, 반핵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그가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렇기때문에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작가로서의 그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마음이 기울고, 또한 여러 작품을 읽은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이 단편집이 세 권 째일 뿐이다.
머리에 혹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죽도록 방치하고, 소년 시절부터 간직해왔던 꿈인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을 실천하려는 주인공 버드의 이야기인 <개인적인 체험>은 무척 즐겁게 읽었다. 버드가 현실로 부터 달아나려는 꿈을 포기하고 누구나가 예상하는 결말을 택했을 때는 안타까움에 잠을 설쳤을 정도로 빠져들었었다. <개인적인 체험>은 두개골 이상을 가진 오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다음해인 1964년에 씌인 소설로, 오에가 작가로 등단한지 7년만인 1957년에 씌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후인 2009년에 씌여지고,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출간된 <익사>는 정말 어려웠다. <개인적인 체험>과 마찬가지로 <익사> 역시 작가의 개인적인 기록에 기초했지만, <개인적인 체험>과는 다르게 <익사>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만큼 매우 관념적인,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소설이다. 열 살무렵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아버지가 익사한 기억을 가진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익사>는 대중소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자전적 혹은 자기만족적 소설이라고 느꼈다. 작가가 <익사>를 통해 말하고 자 한 것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공감은 더더욱 어려웠다. 단지, 역시 '오에는 어렵구나' 라는 일반적인 의견에 동조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단편선집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편집된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 중, 작가로 데뷔했던 대학시절부터 씌인 초기의 단편 여덟 편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좋다. 패전 이후 혼란 속에서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패전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처럼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새롭게 시작되는 활기로 어수선한 분위기 또한 포함된 혼란이었다-애국을 강요당하던, 혹은 애국이 의무처럼 여겨지던 시대에 각 개인은 오히려 물에 젖은 모래알처럼 한데 뭉개져 무기력해져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상황이나 주고받는 대화가 간결하고 매우 선명해서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여덟 편에 줄곧 빨려 들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단편선에 대한 선택에 후회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그러나, 중기 이후로 넘어가면서 익히 알고있듯 오에의 작품을 읽는 것은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에 다시 한번 수긍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작가가 그리는 장면이 선명하게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느낀 감성을 나는 느끼지 못 할 때처럼 당황스럽고,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주눅이 들었다. 시인의 감성을 공감하지 못할 때의 시는 얼마나 지루한 것이던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한림원은 이렇게 논평했다던가. '시적인 힘으로 생명과 신화가 밀접하게 응축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현대에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양상을 극명하게 그려 냈다.' 역시 오에를 좋아하는 데 있어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것은 번외로 여기고 싶다.
개들은 몹시 지저분했다. 온갖 종류의 잡종이 거의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개들이 서로 굉장히 닮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대형견에서 소형 애완견까지 또한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 크기의 비슷한 잡종 개들이 말뚝에 묶여 있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닮은 것일까? 나는 개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볼품없는 잡종인 데다가 바싹 말랐다는 점이 닮았나? 말뚝에 묶인 채 적의라는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점일까?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 적의라는 감정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묶여 서로서로 닮아 가는, 개성을 잃어버린 애매한 우리, 우리 일본 학생, 그러나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너무 젊었든가 너무 늙었다. (12쪽)
초기 작품으로 실린 여덟 편이 모두 좋았지만, 특히 첫 번째 단편 <기묘한 아르바이트>는 더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문과대학생인 '나'가 개 150마리를 죽이는 매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하게되는 이야기인데, 죽음을 기다리며 말뚝에 얌전히 묶여있는 개들을 보며 당시의 학생들, 즉 자신들의 모습을 상기하는 장면이 특히 압권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오에를 대표하는 바로 그 감성, '개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의 표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 개들이 낮은 담에 갇혀서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정말 미치겠어. 우리에게는 담 너머가 보이지만 저 개들은 아무것도 못 보지. 그리고 저 녀석들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잖아." "담 넘어가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잖아." 여학생이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어쩔 수 없다는 게 참을 수 없다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받아먹는다는 게."(19쪽)
군군주의, 전체주의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애국주의는 전쟁이 끝난 평화의 시대, 희망의 시대에도 일본을 떠돌며, 각 개인들의 정신을 흩뜨린다. 저항의 의지조차 품지 못한 개들을 보며 굴욕감을 느끼는 대학원생은 개들에게서 무기력한 자신들을 보았고 이에 분노하지만, 주인공인 '나'는 굴욕감도 분노도 남의 일인 것만 같다. 그는 이미 완전히 지쳤기 때문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데, 무슨 '주의'를 논하는 것 만으로도 지레 지쳐버린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치적인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기력할지라도 '나'만의 감각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의 시기는 본시 냉소를 가장한 무기력을 자양분으로 삼고 숨어드는 '때'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인공 '나'의 무기력을 몹시 개인적인 감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기력한 혹은 냉소적인 개인의 모습은 의과대 해부용 시체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 다른 '나'(사자의 잘난척), 결핵환자 요양소의 냉소적인 순응주의자 중 하나인 '나'(남의 다리), 외국 국인들로 부터 봉변을 당하고 그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는 '나'(인간양), 당시 유행과 같은 '좌익' 대신 실용적인 '우익'으로 돌아서는 열일곱의 '나'(세븐틴) 등으로 이어진다. 도드라지는 행동이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각 개인들은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나'를 고집한다.
내 머릿속에는 돼지비계 같은 뇌가 가득찬 데다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자신을 의식했다. 그러고 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악의적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몸의 움직임이 어색해지고 몸의 여기저기가 봉기해서 제멋대로 무슨 짓인가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치스러워 죽고싶을 지경이다. 나라는 육체 플러스 정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발광한 크로마뇽인처럼 동굴에 들어가 혼자 혈거 생활을 하고 싶었다. 타인들의 시선을 꺼버리고 싶은 거다. 아니면 자신을 꺼버리고 싶은 거고. (211쪽)
비교적 재미있게 읽히는 초기의 작품들은 그러나 읽고 난 후의 여운까지 쉬운 것은 아니어서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깊은 독서와 시와 영감으로 관념적이 되었다는 중기 이후의 작품들도 작가의 독백이 아닌 독자를 향한 소통의 무엇이 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에가 중기 이후로 갈 수록 관념적이 된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더더욱 깊어졌다는 반증이므로 오에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무척 기쁜 일이겠지만, 작가와 같은 템포로 성장할 수 없는 일반적인 독자로서는 무척 아쉽다. 역시 문학은 대중을 향해 열리는 것이 맞다.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도 한정된 독자에게만 이해되는 것이라면, 그 이야기가 갖는 힘 역시 축소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은 인간 오에가 품은 개인과 평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문학계 안과 밖에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외려 작가 오에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드물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오에가 어렵다는 선입견으로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한 나같은 독자에게는 무척 반가운 단편선이다.
- 사설 : 일본의 헌법9조는 세계2차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법이라는 것을 최근에 안 나는 그것에 몹시 반발하는 심정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라면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이러한 법이 승전국인 미국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이 최근에 본 영화 <London Has Fallen>의 내용과 겹치면서 불쾌해진다. 일본헌법 9조의 수호를 지지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 누구에 의해 행해지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분리되는 것에 냉소하는 것 외에 어떠한 저항도 구체화할 수 없는 무기력한 개인이기 때문이다.